[조용호의 문학공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9-18 13: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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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연작소설 '연년세세'(年年歲歲)
희생과 부조리의 삶을 산 이땅의 '순자'들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화해하고 순응하지 않아도 삶은 바쁘다"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연작소설 '연년세세'(年年歲歲·창비)는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고 지은이 황정은은 말한다. 이 경우 '순자'는 단순히 순한 아이, '순자'(順子)가 아니라 순할 순(順)에 놈 자(者)의 의미를 지닌, 이 땅에서 희생과 수난의 삶을 살아온 모든 여성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4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소설은 '순자'로 살아온 어머니 세대와 그 딸로 태어나 다시 '순자'의 업을 이어가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

▲한국문학의 허리 세대로 부상해 각별한 조명을 받고 있는 소설가 황정은. 그는 전작 '디디의 우산'에 이어 이번 연작소설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배경에 깔면서 희생과 부조리의 삶을 강요받은 '순자'라는 이름의 여성들을 호명한다. ⓒ정민영(창비 제공) 


'파묘'(破墓)는 어린 시절 '순자'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엄마 이순일이 민통선 접경지대에 모신 외조부의 묘를 파서 유골을 수습해 화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3·8선 인근을 전쟁통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할아버지 품에서 키워졌던 이순일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친정은 그 외조부의 묘였다. 이제는 관절이 허락하지 않아 성묘도 가기 힘든 엄마를 모시고 둘째딸 한세진이 경계지역에 버려지다시피한 그 묘를 없애는 과정이 전개된다. 특별히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세밀한 묘사로 일이 처리되는 과정을 성실하게 음각하는 작업만으로도 신산한 현대사의 한 삶에 젖어들게 만든다.

 

엄마와 파묘하러 다녀온 수고를 효도라고, 이 땅에서는 직장을 얻지 못하고 뉴질랜드에 가서 정착하려고 애쓰는 남동생 한만수가 말했을 때,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다만 엄마의 삶이 아파서였을 뿐이라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야 희미하지만 따스한 메시지가 겨우 드러난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두 번째 이야기 '하고 싶은 말'에서는 이순일의 장녀 한영진에 초점을 맞추면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말도 못하면서 살아온 이들의 삶을 말한다. 한영진은 유능한 백화점 판매원이다. 아버지 한중언이 시장통 계주가 도망치는 바람에 매일 술 마시고 집안 살림을 부수면서 가계는 빠르게 몰락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진로를 탐색하던 한영진은 진로고 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통업체에 취직했다.

한영진은 '달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가족을 감당해야 했다. 한중언의 담석수술비, 이순일의 치과 비용, 이사할 집의 보증금 대출, 한세진과 한만수의 대학 학비, 한만수의 유학 준비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배려가 부족한 남편 김원상에게는 특별한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한영진은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모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모성이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상황과 그런 관계 속에서 학습되고 형성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엄마 이순일이 평생 식구들 뒷바라지하는 노동에 시달리다 자신의 아이들까지 건사하고 살림을 대신하는 덕분에 비로소 아이들에 대한 '모성'을 느끼게 됐음을 한영진은 자각한다. 엄마 이순일은 딸 한영진에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오래전에 말했고, 한영진은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그 말을 지침으로 여겼다. '살아보니 정말이지 그게 진리였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한영진은 엄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뉴질랜드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들 한만수에게는 그냥 거기 살라고 하면서 왜 내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아무리 늦어도 내가 들어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밥상을 차려내면서 왜 자신을 당신 곁에 묶어두었느냐고. 엄마의 대답이 환청처럼 들린다.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한영진은 되뇐다. 거짓말! 한영진은 엄마의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피 맛을 느낀다. 시절이 달라졌다지만, 이순일의 장녀 한영진은 대를 이어 '순자'의 삶을 산다. 소리 내지 않으면서도 크게 들리게 말하는 황정은의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세 번째 이야기 '무명'(無名)에서는 엄마 세대 '순자'의 삶이 집중적으로 펼쳐진다. 이순일은 3.8선이 그어지는 전쟁 와중에 부모를 잃고 외조부 밑에서 살다가 열다섯 살에 고모 집에 간다. 잘 보살피겠노라고 데려간 고모는 아이들 북적이는 집안의 '식모'로 철저하게 부려먹고 바깥 나들이조차 감시한다. 이웃집 '순자'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서 간호조무사 일을 배우고 독일에 갈 희망을 꿈꾸지만, 다시 고모에게 잡혀 돌아와 애꿎은 '순자'의 뺨을 쳤다. '내 동무, 이웃, 동갑이자 동명인 순자. 내가 순자의 뺨을 때렸고 순자는 울지도 않았다. 이 이야기를 다 어떻게 할까. …순한 아이. 나는 그것이 내 이름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순자였어. 내 친구도 순자였다. 순자가 순자의 동무였다.'

 

고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시장통 남자 한중언과 서둘러 결혼했다. 그 슬하에서 나온 아이들이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 삼남매. 이순일은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라고 중얼거리거니와, 그녀는 '잘 살기'라는 게 대체 뭐였을까 자문한다.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 '다가오는 것들'에 이르면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의 세목이 뚜렷해진다.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은 피난지 거제도에서 만난 미군과 결혼해 노먼 카일리를 낳았다. 한세진이 뉴욕에 가서 노먼 대신 그의 딸 제이미를 만나 노먼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노먼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니 엄마는 양갈보 양색시'라는 한국인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노먼은 한국을 좋아하지 않고, 한국어를 좋아하지 않으며 한국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제이미는 안나라는 이름으로 살다 간 할머니 윤부경과 아버지 노먼에 대해 말한다.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 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황정은은 "1946년생 순자씨의 피란 이야기를 듣고 '무명'을 썼다"면서 "순자씨가 자주 말문이 막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술회했다. ⓒ정민영(창비 제공) 


한영진에 이은 노먼의 용서할 수 없는 항목이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고 황정은은 거듭 드러낸다. 한세진과 동거하는 여자친구 하미영은 '명품도시'를 만들겠다고 구차하게 변명하게 만든, 안산 '생명안전공원'을 반대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순일이 피해자이면서 한영진에게 가해자이듯, 노먼이 한국인의 피해자이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어와 한국을 가해하는 입장에 섰듯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첩돼 있을 때 안타까움은 배가된다. 분명한 것은 어정쩡한 화해와 순응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가오는 것들'은 한세진이 하미영과 함께 본 프랑스 영화 제목이다. 철학 교사 나탈리는 하루아침에 남편의 연애 사실을 통보받고, 노모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자신을 괴롭힌다. 옛 제자인 청년 파비앵과 로맨스를 만드는가 싶지만 실제는 거리가 멀고, 전 남편이 크리스마스에 외롭다며 엉기어도 냉정하게 물리친다.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 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책머리 제사(題詞)를 '순자씨에게' 바친 황정은은 "각각의 소설을 쓸 때마다 소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삶을 살다 나왔고 나는 그게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웠다"면서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로 읽히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고 썼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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