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이 전사들은 오늘도 말이 없고

/ 기사승인 : 2019-03-11 08:20:15
  • -
  • +
  • 인쇄
[남인복의 타박타박 지구촌] 남태평양 이스터 섬

칠레에서 서쪽으로 3600km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
제주도 10분의 1 크기의 신비한 화산섬으로 인기
4백년~천년 전 거대석상 모아이 8백개, 곳곳 지켜

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그냥 떨치고 나서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 먹었다고 다 할 수 있던가.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여러 곳을 다녔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으려 한다. 새삼스런 설렘에 나 자신 다시 길 위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망망대해에 오롯이 솟은 섬 하나. 주변에는 사람이 사는 어떤 섬도 없다. 끊임없이 거칠게 달려드는 바닷물의 기세에 버티지 못해서가 아니라 외로움에 겨워 스스로 바다 밑으로 주저앉아 버리지 않을까. 


그러나 남태평양 한가운데 자그맣게 찍힌 점 같은 이스터 섬은 드넓은 바다에 당당하고 씩씩하게 맞선다. 거대한 석상, 즉 모아이(Moai) 전사들이 섬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큰 귀에 푹 꺼진 눈, 길쭉한 코 등 울퉁불퉁하게 생겼지만 온통 물만 보이는 섬에서 자칫 불안해질 수 있는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같은 존재다. 아울러 정감 어린 표정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손짓하듯 불러모으고 있다. 


칠레에서 서쪽으로 3600km 떨어져 있는 이스터 섬까지는 산티아고 공항에서 비행기로 5시간 넘게 걸린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니 외딴 섬인데도 국제선 환승이 있다. 뉴질랜드와 타이티 섬을 오가는 비행기가 뜨는 것이다.

칠레 국립공원, 관광객은 입장권 구입해야


▲ 15개 석상이 서 있는 아후 통가리키. 일본의 지원으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부활절(Easter)에 발견했다고 해서 이스터로 붙였으며, 1888년에 칠레 땅이 되었다. 스페인어로는 파스쿠아(Pascua, 부활절) 섬, 원주민들은 라파 누이(Rapa Nui, ‘큰 섬’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제주도의 10분의 1 정도 크기의 화산섬으로 꼭지점을 북서쪽에 둔 이등변 삼각형 모양이다.

 

섬 전체가 칠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공항에서 3만 페소(미화 60달러, 12세 이하는 50%)를 내고 입장권을 사야 한다. 섬의 유명 관광지에 들어갈 때도 필요하다. 한국도 제주도 같은 곳에선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거대한 모아이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고고학 자료들에 따르면 대부분 1000~1600년 사이에 세워졌으며, 높이 3~12m, 무게 3~90t으로 대략 800개가 있다. 섬에 거주하던 부족들이 세력 과시를 위해 경쟁적으로 더 크게 더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석상을 짓는 과정에서 땅을 파헤치고, 운반용 나무를 잘라내는 통에 섬의 자연환경이 망가지고 말았다. 석상이 오히려 섬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주민들이 다시 석상을 부서뜨리기 시작했고,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눈이 빠지고 몸체가 파손된 것들이 많아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섬에서 사용되던 상형문자 ‘롱고롱고(Rongorongo)’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인구가 줄어들고 문자를 해독할 지식인 집단도 사라져버려 섬에 관한 모든 것은 풀리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 다만 폴리네시아인들이 4~5세기 무렵 이주해 정착했으며, 폴리네시안 전통 문화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모아이는 무엇일까. 초기에 섬을 찾은 유럽 사람들은 종교적 의식을 관장하는 신상으로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아이가 있는 곳을 부르는 이름에 제단을 뜻하는 아후(Ahu)라는 단어가 붙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정작 주민들은 조상들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높은 지위를 누렸거나 특별한 공을 세운 조상들을 모시는 묘석으로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현재의 안녕을 축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부인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올해 초 미국 연구진은 모아이가 놓인 곳은 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발표했다. 따라서 모아이는 신상이 아니라 공동체 삶에 필수적인 식수원을 표시하는 실용적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다. 

 

외계인이나 영적 존재 관련 등 불가사의함을 떠올리게 했던 신비로운 이미지는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로 남을 것인가. 어쨌든 모아이들은 아직 밝히지 못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바다로부터 섬을 지키듯 해안가에 서 있어


▲ 마당에 텐트가 쳐져 있는 미히노아(Mihinoa) 캠핑장


모아이들은 대부분 거센 바다로부터 섬을 보호하려는 듯 바다를 등지고 해안가에 서 있다. 그런데 아후 아키비(Ahu Akivi)의 7개 석상들만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7인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섬을 침입하려는 외부 세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막아내려는 것일까. 뉘엿뉘엿 저무는 하늘 아래서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어 결기마저 느껴진다.

 

또 가장 많은 15개 석상이 있는 아후 통가리키(Ahu tongariki)는 일출명소로 유명하고, 서쪽 지역의 아후 타하이(Ahu Tahai)는 해넘이 장소여서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번갈아 드나든다. 붉은색 모자 푸카오를 쓴 석상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이 부쉈다고 한다. 


섬 동쪽에는 채석장 라노 라라쿠(Rano Raraku)가 있다. 이른바 모아이 제조공장이다. 아직도 곳곳에 모아이가 많이 놓여 있다. 반쯤 땅에 묻힌 것, 엎어져 코를 박고 있는 것, 몸통만 있는 것 등등. 완성했으나 해안으로 운반되지 못한 것들이다. 

 

그들에게 말을 건네 본다. “누가 언제 무엇에 쓰려고 이렇게 만들었나?” 스치는 바람만 귀를 간질인다. 얼굴 표정을 보면 할 얘기가 많은 듯한데 들려주진 않는다. 잠시 머무는 주제에 뭘 그리 알려 드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같다. 


숙소가 있는 항가 로아(Hanga Roa)에서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오롱고까지는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한 시간 정도 줄곧 오름이 이어지는데 사방에 열려 있는 바다를 보면서 걸으니 이마에 땀이 밸 때쯤 정상에 올라선다. 

 

오롱고에는 거대한 분화구 라노 카우(Rano Kau)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조인(鳥人, Birdman, 새 사람) 문화’와 관련된 거주지를 재현해 놓은 민속촌도 꾸며져 있다. 내전에서 승리한 전사 계급은 새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최고신 마케마케를 숭배했는데, 그 신앙에 따른 의례를 행했다. 해안 끝 벼랑에서 떨어져 바라보이는 자그마한 섬 3개 쪽으로 헤엄쳐 가서 새알을 가져오는 조인(鳥人)이 1년 동안 섬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미국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제작한 영화 <라파 누이>(1994)에서 다뤄 이스터 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2009년 가수 서태지가 8집 앨범에 실은 ‘모아이’의 뮤직비디오를 이 섬에서 찍기도 했다. 


다시 발걸음을 북쪽으로 돌린다. 섬에서 유일한 백사장 아나케나 해변이 지친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너나없이 일단 물에 뛰어든다. 기온이 변덕스러워 바닷물에 몸이 으스스할 만도 한데 한두 시간은 끄떡없이 버틴다. 역시 젊음이 좋다. 해변 옆에도 모아이들이 활기차게 뛰노는 그들을 지켜주듯 그윽하게 바라보며 서 있다.

섬 일주 도로 없어 불편…관광 성수기는 2월


▲ 분화구 라노 카우 전망대

 

아직 섬 일주 도로가 뚫리지 않아 전체를 둘러보기는 쉽지 않다. 차를 빌리거나 투어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이스터 섬을 다녀온 사람은 다들 물가가 비싸다고 했다. 사실 라면, 과자, 과일 등 육지보다 3~5배 정도 비싼 편이다.

 

어쨌든 그 말에 꽂혀 2l짜리 생수병을 두 개 들고 갔다. 다른 비행기 노선과 달리 물을 가지고 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물건들에는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해 사과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보호 차원에서 농산물은 특히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다.


하룻밤 6000페소(대략 1만 2000원)인 1인용 텐트 숙소는 몰아치는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영락없는 한뎃잠이다. 그러나 텐트 자락을 들치면 바로 눈앞에서 세찬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들어 작은 바위들을 뭉갤 듯 덮친 뒤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은 자신의 뜨거운 열정을 바다에 흩뿌려준다. 자연이 빚어내는 경이를 함께 하는 순간순간 벅찬 느낌에 여행자는 잠시 외로움도 잊는다.


이스터 섬을 찾는 가장 좋은 시기는 2월이다. 비교적 온화하고 무엇보다 태풍이 없어 안전하단다. 그 좋은 날의 만남을 약속할 순 없지만 섬을 떠난 뒤에도 언젠가 모아이가 들려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빌어본다.

 

글·사진 남인복(언론인)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뉴스댓글 >

핫이슈

만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