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애니원, 빅뱅도 고객이었는데"…명맥 끊겨가는 K-수제화

문재원 / 기사승인 : 2021-02-23 15: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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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세계] 성수동 수제화거리 한용흠 구두 명장
14살 때 기술 익혀 50년 외길…"기술 전수되었으면"
평균 경력 40년 이상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구두를 제작하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

1980년대 명동, 충무로 일대의 도심 개발로 밀려난 수제화 업체들이 모여 형성된 이 거리는1990년대까지 약 1000여 개에 가까운 구두 제작 관련 공장들로 북적였다.

지금은 공장주와 제작공의 임금 갈등 격화와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른 임대료 상승으로 국내 최대 수제화 거리의 명색이 무색할 만큼 거리 곳곳이 카페들로 바뀌고 있다.

▲ 한용흠 구두 명장이 지난 1월 20일 서울 성수동 수제화거리 내 공방에서 구두 제작 전 발 치수를 재고 있다. [문재원 기자]

"예전엔 이곳이 최고였죠, 원자재 업체부터 수제화 업체, 기성화 브랜드 공장 할 거 없이 많았죠. 지금은 다들 힘들어요. 수제화 제작뿐 아니라 수선일도 같이 해야 해요."

장애인·연예인들을 위한 특수 신발과 수제화로 명성을 떨쳤던 한용흠(62) 명장의 한숨이 깊다. 값싼 중국산 기성화가 시장을 석권하면서 정성과 혼으로 만드는 수제화의 명맥은 이제 간당간당하다.

▲ 수제화 제작에 사용할 원단을 재단하고 있는 한용흠 명장. [문재원 기자]


원단을 재단하던 한 명장이 지난날을 회상했다.

"배고파서 시작했어요, 국수 사 먹으려고. 당시에 삼양동에 가면 10원짜리 국수 파는 곳이 있었어요. 점심때만 주는데, 정부에서 주는 곳이라 많이 쌌죠. 국수만큼이나 줄도 길었어요. 제 월급이 3000원이 었는데 처음 일했던 곳에서는 돈을 잘 안 주더라고요. 그래서 TV 케이스 만드는 공장으로 갔죠. 월급도 더 많고 제때 잘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다시 구두가 만들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구두 공장에 취직하고 상계동으로 군화 가죽을 사러 갔어요. 그곳에 가면 버려진 군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거든요. 군화 가죽을 사 와서 남자 단화를 만들었어요. 그게 돈이 아주 잘 됐죠. 일도 재밌고 열심히 했어요. 한 1년 하다 보니 기술자가 됐어요. 그때 나이가 14살쯤일 거예요. 월급도 올랐죠."

지난날을 회상하던 한 명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당시 공장에 영업사원 아저씨들이 있었어요. 한 15명 정도가 공장에서 만든 단화를 가져다 구로동 공단에서 팔았는데, 공장·건설 노동자들이 잘 사 갔어요. 다른 신발에 비해 값도 저렴하고 군화 가죽이라 내구성도 좋았거든요. 하루는 한 아저씨가 제게 '야 꼬마야 얼른 만들어야 내가 가져가지 않냐?'라고 호통을 쳤어요. 그러자 당시 영업사원 감독이 그 아저씨 뒤통수를 치며 '꼬마가 뭐냐 우리 한 선생한테'라고 혼쭐을 내주셨죠. 그때 처음 들어봤어요. 선생이라는 호칭을. 너무 듣기 좋았어요."

남성화 공장에서 일하던 한 명장은 이후 여성화 제작을 배우기 위해 명동으로 향했다. 당시 명동은 여성화의 메카였다. 명동에서도 한 명장의 열정은 남달랐다. 다른 직원들이 퇴근하면 연습에 몰입하기를 반복했다.

"참 행복하게 일했어요. 그러던 중 친한 선배가 금O 제화 외주공장을 운영했는데, 연락이 왔어요. 공장장으로 와달라는 거예요. 너무 좋았죠. 공장장을 하면 내 신발 사업을 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거란 생각을 했어요. 당시 25살이었어요."

이후 한 명장은 쌈O, 탠O 외주 공장장과 일본 사미 OO 수제화 개발 실장 등을 지내고 1996년, 내 발처럼 편한 신발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수제화 사업을 시작했다.

"잘 됐어요. 당시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어요. 신발이 20켤레가 넘게 있는 분이신데. 제가 만들어준 신발을 신더니 집에 가실 때 가슴에 품고 가셨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편한 신발은 처음이라면서요."

하지만 구두를 잘 만드는 것과 사업은 달랐다. 여러 문제로 공장을 닫고 한국 제화 아카데미에서 강사일을 하며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갔다.

"고민이 많았죠. 그래서 부산에서 열리는 섬유 관련 박람회에 갔어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박람회예요. 그곳에서 한 원단을 보고 저는 흥분이 가시질 않았어요. 카멜레온 원단이었어요. 저 원단으로 신발을 만들면 대박이겠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한 명장은 곧바로 원단 사장에게 신발 제작 제의 후 샘플을 만들었다. 이후 독일 섬유 박람회에서 선보였다. 현지 바이어들 사이에서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다음 해, 부산 섬유 박람회에서도 카멜레온 신발을 선보였다.

"YG엔터테인먼트에서 연락이 왔어요. 박람회에 온 YG 직원이 제 신발을 본 거죠. 여성 그룹이 있는데, 무대용 신발을 제작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 그룹이 투애니원(2NE1)이었어요. 이후 빅뱅 신발 제작 의뢰도 들어오고, 그때부터 인연이 맺어졌어요. 유명 메이커 협찬을 받지 않고 내가 만든 신발을 찾아줘서 뿌듯했죠. 빅뱅 친구들이 저보고 '제6의 멤버'라고 했지요. 하하."

"송대관 씨는 키높이 구두를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태진아 씨랑 키 차이 없게 해달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나요. 또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 쇼 모델 신발 제작을 한 6년간 했어요. 모델분들이 힐을 신고 워킹하다 넘어지면 안 되니 신경 많이 썼죠."

▲ 갑피 미싱(구두 원단 박음질)을 하고 있는 한 명장. [문재원 기자]

 

▲ 갑피 미싱(구두 원단 박음질)을 하고 있는 한 명장. 눈은 돋보기를 써야 하지만 손의 감각은 변함이 없다. [문재원 기자]

 

▲ 중창을 작업하는 한 명장. [문재원 기자]

 

▲ 구두 주문자의 발 형태와 동일한 모형을 제작하는 한 명장. [문재원 기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손의 감각이 필요해요. 발 치수를 잴 때 그 느낌이요."

▲ 주문자의 발 형태와 동일한 모형을 제작하는 한 명장. [문재원 기자]

 

▲ 구두 형태를 잡고 있는 한 명장. [문재원 기자]

 

▲ 한 명장이 지난 1월 21일 서울 성수동 수제화거리 내 자신의 공방에서 구두 밑창을 고르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 완성된 구두를 신어보는 주문자. [문재원 기자]


이후 한 명장은 발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특수 구두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양 다리의 높이가 다르거나, 발 모양이 특이한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분들에게 편한 구두를 제작해 주고 싶었어요."

▲ 한 명장의 구두를 오랜시간 착용한 김인순(가명·70) 씨가 지난 1월 22일 일산의 한 공원에서 기자에게 자신의 발과 구두를 보여주고 있다. [문재원 기자]


김인순(가명·70) 씨는 "저는 보다시피 엄지 발가락뼈가 튀어나왔어요. 운동화는 그냥 발볼 넓은 걸 사 신으면 되는데, 구두는 발에 맞는 걸 찾기 힘들었죠. 한 사장님이 만들어주면 참 편했어요."

▲ 서울 성수동 수제화거리 내 한용흠 명장 공방에 빅뱅 무대용 신발과 음반이 진열돼 있다. 한 명장은 당시 신발을 두 켤레씩 제작했다. [문재원 기자]

 

▲ 한 명장 공방 벽에 걸린 연예인 사진들. [문재원 기자]

 

 

▲ 한 명장이 지난 1월 21일 서울 성수동 수제화거리 내 공방에서 자신이 제작한 빅뱅 무대용 신발과 지드래곤 뮤직비디오 신발을 보여주고 있다. 한 명장은 당시 신발을 두 켤레씩 제작해 소장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지난 2009년부터 7년간 국제화 아카데미 강사일을 하며 100여 명에 달하는 제작공을 길러낸 한 명장.
"우리나라 수제화 기술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지만 이렇게 가다가는…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수제화 거리가 수제화 거리답게 유지되고 제작공들도 젊어져야 기술을 이을 텐데…"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장인은 대가 끊기고 있는 수제화의 현실을 얘기하며 헛헛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UPI뉴스 / 문재원 기자 mjw@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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