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30도 속 즐거운 일탈…차가운 눈 조각하며 따뜻함 느껴요"

조채원 / 기사승인 : 2021-01-04 11:14:19
  • -
  • +
  • 인쇄
하얼빈국제눈조각대회 '국가대표 자매' 방그레·방시레 씨

한국인에겐 '안중근 쾌거의 도시'이자 여름엔 맥주 축제, 겨울엔 눈꽃 축제가 열리는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哈尔滨). 올해도 하얼빈 곳곳에 사람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는 얼음과 눈조각상이 들어섰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썰렁한 새해를 맞은 한국과는 달리 하얼빈은 '하얼빈국제빙설제'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 지난해 12월 24일 하얼빈국제빙설제 행사 장소 중 한 곳인 하얼빈빙설대세계 22회 개원식 모습. [하얼빈빙설대세계 홈페이지 캡처]  


일본 삿포로 눈축제와 캐나다 퀘백 윈터 카니발과 더불어 세계 3대 빙설 축제로 꼽히는 하얼빈국제빙설제의 37번째 개막식이 오는 5일 열린다. 하얼빈국제빙설제는 얼음조각대회, 눈조각대회, 얼음등축제 그리고 각종 동계스포츠 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로 구성된다. 그 중 얼음조각·눈조각대회의 경우 국내 대회가 열린 후 국제 대회가 이어진다.

올해 26회를 맞는 국제눈조각대회는 각국을 대표하는 눈조각가 3-4명이 팀을 이루어 3일 동안 조각상을 완성해 전시하는 대회다. 오는 10일에서 13일 사이로 예정돼있다. 국내대회에서 1, 2, 3등에 입상한 팀만이 국제대회 참가자격이 주어질 정도로 그 수준도, 자부심도 매우 높다. 이 대회에 지난해까지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가해 온 '국가대표 자매'가 있다. 바로 방그레 씨와 방시레 씨다. 1999년 그레 씨가 최초의 한국인 대표로 출전한 이후, 2000년부터 시레 씨도 팀에 합류했다.

루쉰미술대학(鲁迅美术学院)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레 씨는 다롄공업대학교(大连工业大学) 예술디자인대학 조소과 교수로 15년째 학생들을 가르친다. 중국에 터전을 잡은 그레 씨와는 달리 시레 씨는 한국으로 귀국해 창덕궁 중국어 해설사로 13년째 근무 중이다. 이들은 매해 겨울 하얼빈, 베이징, 창춘 등지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중국 내 눈조각대회 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 몽골 등에서 열리는 해외대회에도 출전하는데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 길이 모두 막혔다. 

▲ 2019년 하얼빈공청대학교에서 열린 국제대학생눈조각대회에 학생들과 함께 참가한 방그레 씨(뒷줄 가운데). 그의 팀은 이 대회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 [방그레 제공]


ㅡ2021년 눈조각대회는 참가하지 못해 아쉽겠다

"시레: 최근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중국 내 코로나19가 다시 확산하는 상황이다. 하얼빈국제빙설제 주최 측도 송년 공연과 불꽃놀이 행사 등 중 많은 인파가 밀집할 가능성이 있는 행사를 취소하는 등 방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2021년 26회 국제눈조각대회는 1월 10일부터 3일 간으로 예정돼있는데, 중국 외 국가의 선수들의 입국이 어려운 만큼 대회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레: 재작년 10월 말 다롄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어 작년 1월 재활치료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3월에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지금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항공편, 자가격리도 문제지만 외국인 입국에 대한 규정이 대폭 강화된 탓에 비자조차 쉽게 안 나온다."

▲ 2019년 하얼빈국제눈조각대회에서 3등상을 수상한 '평화의 여정' [방그레 제공]
▲ 2019년 하얼빈국제눈조각대회에서 3등상을 수상한 '평화의 여정' [방그레 제공]


ㅡ하얼빈 국제눈조각대회와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

"그레: 1996년 랴오닝성 선양에 위치한 루쉰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루쉰미술대학은 중국 내 3대 미술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대학인데, 그 중 조소과는 중국 내 최고 수준이다. 4학년이었던 1999년, 하얼빈 타이양도(太阳岛)에서 열리는 국제눈조각대회 주최측으로부터 한국대표로 출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때 처음 한국팀이 생겼고, 팀을 꾸려 참가하게 됐다. 선양도 하얼빈만큼 춥고 눈이 많은 도시라 국제대회는 아니라도 시에서 여는 크고 작은 대회에서 눈조각품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시레: 2000년에 루쉰미술대학 의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미대 입학을 준비하면서 언니의 같은 과 친구에게 과외도 받는 등 조각도 틈틈이 접했다. 보통 3-4인이 팀을 꾸려 참가하는데 한국팀이 두 번째로 출전한 2000년에는 내가 합류하게 됐다. 처음에는 디자인 전공인 내가 조각가들 사이에서, 국가대표 자격으로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그런데 곧 도구를 다루는 것도 익숙해졌고 오히려 디자인 전공자라 디테일에 강하다는 강점도 있다. 알고보니 조각 대회가 조각가들만 참가하는 건 아니었다. 유럽팀 같은 경우는 사진, 디자인, 컴퓨터그래픽 전공 등 다방면의 미술전공자들이 한 팀을 이룬다."

ㅡ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궁금하다
 

"그레: 보통 대회장에 가면 눈 큐브가 만들어져 있다. 대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가로 3m, 세로 3m, 높이 3.5m의 크기다. 이것을 기준으로 대회에 참가하기 전, 팀장을 중심으로 팀원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지 의견을 낸다. 의견 조율을 통해서 실제 조각의 10분의 1 크기 모형을 우선 제작한다. 각자 어느 부분을 담당할 지 정한 후 대회에 참가해서는 눈조각 전용 도구로 3일 동안 같이 깎아내는 거다."
 

ㅡ작품 제작 과정이 힘들어 보이는데

"그레: 영하 30도가 기본인 날씨에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동안 세 명이 붙어서 작업을 한다. 체력적으로 굉장히 지치는데다 눈이 얼면 얼음만큼 단단해져 부상 위험도 있다. 잘못 깎으면 수정도 힘들다. 눈을 다시 붙이면 그 부분이 투명하게 변하거나 누렇게 변하는 등 티가 나기 때문이다. 이러면 작품 완성도가 떨어지는거다. 단시간이지만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어느 예술가나 똑같기에 좀 예민해지기도 한다.

▲ 눈 조각 작업 중인 방시레 씨 [방그레 제공]


시레: 눈을 동시에 깎아내는 작업이기에 단합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합의된 도안을 갖고 작업하더라도 대회 당시 날씨에 따라 변수가 있어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소통하고 조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날씨가 이례적으로 따뜻하면 다 완성한 부분이 녹아버리기도 하고, 갑자기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세밀하게 조각한 부분들이 덮인다. 그런 상황들을 함께 대처해가면서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역량을 끌어내야 하는 거다. 아무리 잘하는 사람끼리 모여도 손발이 안맞으면 완성도가 떨어진다. 완성된 작품을 보면 단합력이 좋았는지 여부를 선수들끼리는 한 눈에 알 수 있다."
 

ㅡ한국팀만의 강점이나 특징이 있다면

"시레: 한국인만의 헝그리정신에서 비롯된 창의성 같은 게 있다. 눈조각을 할 때 다양한 장비를 사용하는데 장비 면에서는 러시아팀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런 결핍 속에서도 작품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잘 찾아내는 것 같다. 대표적인 게 손으로 사포질을 해 눈조각상을 대리석 조각처럼 매끈하게 만들어낸거다. 처음 그걸 본 외국인들이 어떻게 했냐며 저마다 비법을 전수해달라고 졸랐다. 그 이후 하얼빈 국제대회에서 사포질이 유행이 됐고, 지금은 사포질이 안 돼있는 작품은 미완성으로 친다.

그레: 한국의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접목시키려고 노력한다. '탈'과 '승무'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 작년에는 '평화의 여정'이라는 작품 속에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한국만의 무언가를 담으면 그 자체가 특별해질 수 있는 것 같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주제가 주어질 때도 있지만 보통 현시대를 반영하는 공통 주제로 작품을 구상할 때가 많다고 했다. 시의성을 반영하는 탓에 2021년 대회에는 코로나19 관련한 작품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 예로 2015년 제작했던 작품 '사과(苹果)'를 들었다. 시레 씨는 아름다운 사과 속 파묻힌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해 환경파괴 등을 유발하는 인류의 지나친 욕망의 폐해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작품 '사과'. 해당 작품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당시 지역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방시레 제공]


ㅡ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회나 사건은


"시레: 매번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느끼는 만족도는 최상에 가깝지만, 가장 최근이자 올해 초에 나갔던 일본 홋카이도 나요로 축제가 기억에 남는다. 나요로는 국제도시인 하얼빈에 비하면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대륙스케일로, 크고 장엄하게 진행되는 중국 대회와는 달리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다.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대회를 진행한다기보다는 정부지원은 최소한으로 받고 마을주민들 중심으로 운영된다. 동네주민들이 돌아가면서 해외 선수들에게 밥도 해주고 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대회가 끝나면 동네 아이들이 감사카드를 써서 직접 건네주기도 한다. 따뜻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대회라 또 가고싶다.

▲ 나요로 눈조각대회 작품 '신라' [방그레, 방시레 제공]


그레: 눈을 깎다가 너무 얇게 깎았는지 작품이 무너져 내린 적이 한번 있었다. 얼음보다 단단한 눈덩이가 어깨 위로 떨어져서 몸살처럼 며칠 앓았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해 내 뿌듯했다. 상은 받지 못했지만 다른나라 선수들의 응원과 격려에 큰 감동을 받았다."
 

ㅡ자신이 생각하는 눈 조각의 매력은
 

"그레: 어떤 조각가들은 눈조각이나 얼음조각이 진정한 예술작품이 아니라고 하찮게 생각하기도 한다. 눈조각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제한적이고 보존 기한도 짧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을 가졌기에 눈조각은 그 완성품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도 예술이라는 매력을 갖고 있다.

눈은 차갑지만 눈조각대회는 인간미와 따뜻함이 넘친다. 매년 세계 각국의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오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도 눈조각의 매력이다. 눈조각대회에 나간 지 거의 20년이 됐는데 처음 출전했을 때 알게 된 러시아·말레이시아 친구들 등과 아직까지 교류한다. 세계 여러 나라 작가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자웅을 겨루며 짧은 시간에 작품을 완성해 느끼는 성취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체력이 받쳐주는 한 평생 이 일을 하고 싶다. 

시레: 눈조각은 직장생활을 하는 내가 1년에 한번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탈이다. 눈조각을 하면서 삶의 이유나 행복을 찾는다. 어떤 사람은 눈은 녹아 없어지니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와 반대다.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작품을 만들어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작품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내년에 더 잘해야지 하는 욕심이 생긴다."

▲ 시레 씨는 창덕궁은 비수기지만 전 세계는 눈꽃 축제로 한창인 1월, 한 해 연차를 몰아 써 눈조각대회에 참가한다. 그는 인터뷰를 빌려 동료들의 배려에 감사를 전했다. [방시레 제공] 


ㅡ앞으로의 계획이나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레: 본래 1월 경에 열리는 베를린 눈조각대회에 참가하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2월로 미뤄졌다. 이것도 열릴 지 모르겠지만 꼭 거길 가 보고 싶다. 눈큐브를 직접 만드는 등 다른 대회와 작업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고 해 더욱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 개인전 또는 동생과 콜라보 전시도 빠른 시일 내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그레 씨는 2018년 평창올림픽 눈꽃축제 '눈조각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작품활동을 하고 싶지만 눈조각을 하기엔 한국은 너무 따뜻해서 아쉽다고 말했다. 사진은 당시 국내 조각가와 협업해 만든 눈 용조각상. [방그레 제공]


시레: 지금 하는 일이 있지만, 조각도 체력이 되는 한 계속하고 싶다. 조각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갈증이 더 크다. 최근 관심분야는 목조다. 눈이 내리지 않는 멕시코나 콜롬비아에서는 볏집 등으로 만드는 설치미술 대회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참가하고 싶다. 눈이라는 재료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조각을 배우면서 세계 여러 대회에 참가해보는 것이 꿈이다."

UPI뉴스 / 조채원 기자 ccw@upinews.kr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핫이슈

2021. 1. 17. 0시 기준
72340
1249
58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