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9월 3일 방송의 날에 생각한다

UPI뉴스 / 기사승인 : 2020-09-03 17: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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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단파방송 수신 사건은 한류의 기원
9월 3일은 57회 방송의 날. 방송의 생일이다. 애초에는 10월 2일이었다. 1947년 9월 3일 한국 방송이 국제무선통신회의(ITU)로부터 HL이라는 국제호출부호의 사용을 인정받은 뒤, 이를 처음으로 10월 2일에 사용한 것이 각각의 기원이다 1964년에 제정했다고 한다. 1947년 이래 16년간은 생일상을 못 찾아먹은 셈이다. 방송의 날은 방송인들에게는 휴무일이 되고 방송사 구내식당에는 특식이 나오기도 했다.

 

1964년이면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1961년에 KBS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고, 기존의 KBS, CBS, MBC에 이어 DBS, TBC 등의 방송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다투어 개국할 무렵이다(이상 개국순).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떠오르는 미디어인 방송을 주시하면서 이들을 잘 관리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방송의 날' 지정도 그런 선심과 용의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있다.

 

1964년 방송의 날을 처음 만들 때는 HL 첫사용일인 1947년 10월 2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기록에 따르면 해방되고도 2년이 지난 1947년 9월 30일까지 KBS 라디오는 호출 부호를 JODK를 사용했다고 한다. JO는 일본 방송의 콜 사인이다. 콜 레터스(call letters)라고도 하는 콜 사인은 ITU 산하의 세계무선주관청회의에서 배정되는데 미군정하인 1947년 9월 3일에 새로이 HL을 배정받은 것이다.

 

이후 10월 2일은 HL을 처음 사용한 날이다. 비유하자면 창씨개명했다가 자기 본명을 비로소 찾아 'HL이라고 부르고 또 불려진 날'이라고 할까. 생일로 삼기에 적당하다. 그런데 1977년에 들어 방송의 날의 날짜가 달라진다. 생일이 바뀐 것이다. 그랬다가 1978년에 다시 날짜가 바뀐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도 아니고... 무슨 사연인가.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

 

60-70년대에 10월 2일 방송의 날, 10월 3일 개천절로 방송인들은 이미 그 귀한 연휴를 누렸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 후반에 가서 10월 1일 국군의 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국군의 날은 1956년에 정식 국가 기념일으로 제정되어 1976년부터는 공휴일이 되었으나 1990년 기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나무위키) 이로 인해 돌연 방송의 날에 불똥이 튀었다.

 

구글 검색을 해 보니 1976년 10월 1일은 금요일이다. 당시는 주5일제가 아니다. 그런데 10월 2일이 방송의 날이라 당시 방송인들은 국군의 날, 방송의 날, 개천절(일요일) 등 유사 이래 최초의 3일 연휴를 즐겼을 것이다. 국군의 날이 월요일이거나 개천절이 토요일이면 4일 연휴가 될 판이다. 아니 이럴 수가... 때는 바야흐로 '중단없는 전진'을 하던 유신시대다.

 

기겁을 한(?) 방송인들이 이듬해 새로운 방송의 날을 찾았다. 그런데 그날은 2월 16일이었다. 이 날은 일제하 조선총독부 산하의 경성방송국이 개국을 한 날이다(1927년 2월 16일). 하필 고르고 골라 이날에 생일상을 차렸으니 이런 망발이 없다. '한국방송의 흑역사'라고 할 만하다. 필경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시작한 JODK를 한국방송의 기원으로 삼은 것에 대한 각계의 비판이 쇄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78년에 부랴부랴 생일날을 다시 바꾸었다. 10월 2일로 다시 갈 수도 없고, 묘안을 낸 것이 9월 3일이다. 1947년 이 날에 ITU로부터 HL을 배정받았던 것이다.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방송의 날은 1964년에서 1976년까지는 10월 2일, 1977년에 2월 16일, 그리고 1978년에 9월 3일로 시행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2018년에 철도의 날이 종전 9월 18일에서 6월 28일로 바뀐 것도 '일제잔재 청산'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 사이 방송계가 격변의 세월을 보냈다. 방송하면 다 지상파 방송(한때는 공중파 방송이라고도....)이었으나 그동안 방통융합과 디지털 혁명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방송기술의 발전, 방송제도의 부침 속에서 케이블, 위성방송, DMB, IPTV, 종편, OTT 등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등장했다. 각각 연원이 다른 플랫폼 종사자의 입장에서는 현행 방송의 날에 대한 공유의식이나 공감대가 부재할 것이다.

 

분명히 영상콘텐츠를 보기는 보는데 디바이스도 다르고 제조원도 제 각각이다. 아마도 뿌리의식도 다를 것이다. 케이블 방송 종사자들은 3월 1일이 생일이라고 여길 것이고(1995년 3월 1일, 케이블 시대 개국), 그 중에서도 종편 채널들은 자신들이 개국한 12월 1일을 생일로 여길 것이다(2011년 12월 1일 JTBC, TV조선, 채널A 개국). MBN은 1995년 3월에 뉴스채널로 개국을 했다가 종편 채널로 바뀌었으니 다른 3사와 족보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삼가 종편 4사가 합동으로 생일상을 차릴 날을 제안해 본다. 종편 설립을 가능하게 한 미디어법 개정안이 2009년 당시 이윤성 국회 부의장의 아수라장 사회 속에 '날치기' 통과된 7월 22일은 어떨까. MB 정권의 미디어법 강행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종편은 없었을 것이다. '종편의 날 7월 22일' 어떤가. 이 자리엔 MBN이 동참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종편4사 체제가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어떻든 방송정책의 난맥상과 미디어 난개발의 와중에 애먼 종사자들만 상호 배타적이며 때로는 적대적이다. 뉴 미디어는 올드 미디어의 위상과 시장을 잠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방송의 날' 깃발 아래 생일떡을 같이 먹기에는 혈통이 같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실 지상파에서 시작해 케이블을 거쳐 IPTV와 OTT 쯤에 이르면 거의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의 매체로 보인다.

 

방송계의 한 인사는 "각 매체간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별로 한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아 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뭔가 기념일을 정하고 축제를 지낼 땐 함께 했던 즐겁고 힘들었던 역사와 경험, 기억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게 없으니 같이 모여서 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장차 전혀 새로운 미디어환경에 처하면 지금의 경험들을 추억하고 싶어할 때가 올지는 모르겠다."라고 부언했다.

 

그런 맥락에서 방송통신계가 함께 하는 합동생일상을 찾는다면, 무릇 오늘날 방송통신의 남상(濫觴·사물의 기원)을 제공한 마르코니의 무선통신쯤은 어떨까. 마르코니라면 다들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1901년 영국에서 대서양 건너편 3570km 지점에 있는 캐나다까지 무선으로 문자를 보내는 데 성공한다. 지구상의 모든 통신과 방송의 발달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생일은 1874년 4월 25일이다. 문제는 그가 이태리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무선전화방송(라디오) 공개 실험을 1924년 12월 17일을 방송의 날로 삼는 방법이 있다. "이는 한국인의 기술로 성공한 첫 자주방송이므로 한국 방송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박기성). 그런데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공개 실험을 한 주체가 일제하 조선일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선일보 기원 방송의 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대안이 있다. 바로 12월 27일이다. 1942년 이 날을 전후로 '일제하 단파방송 수신 사건'이 일어났다. JODK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직원들이 비밀리에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을 듣고 전황 등을 주변에 알려주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모진 탄압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방송인들에게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한 학자도 있다.

 

말하자면 방송전파를 수단으로 삼아 반일 투쟁운동을 한 것이니, 일제가 도입한 방송 시스템으로 일제에 되갚아준 것이다. 12월 27일은 '방송'이라는 박래품(舶來品·다른 나라에서 배로 실어 온 물품)이 한국인에 의해 체화되어 치열하게 발현된 날이다. 돌이켜 보면 서양의 기술에 우리의 콘텐츠를 실현하는 사진, 영화, 방송 등이 다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또다른 의미로 한류의 기원이라고 할 만하다.

▲ 정길화 교수


정길화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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