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피우지 못해 울던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2-13 15: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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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박남준 시인 찾아가
대표적인 봄맞이꽃 복수초 영접
'어린왕자'와 '쌔드무비'를 보다
▲ 황금잔에 노란 보석을 품은 듯한 복수초. 겨울부터 봄까지 피어나는 이 꽃은 대표적인 영춘화로 꼽힌다.

"노란 꽃 복수초를 보았다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처절하다는 생각이 순간 떠오르는 것이지 복이 들어온다는데 그토록 눈부신 빛이 처절했다니 이면, 그래 눈부신 것 속에는 눈물겨움이 있지 그건 팽팽한 긴장이야 마른 풀잎들 사이 몸을 사린 채 어린 쑥들이 삐죽거렸다"(박남준, '무서운 추억')

노란 꽃 복수초를 만나러 하동에 갔다. 얼마나 찬란한 노랑이기에 처절하다는 생각까지 떠올렸을까 싶었다. 아직 겨울인데도 복수초의 노랑은 눈부셨다. 시인의 집 마당 돌확에는 물이 얼어 있는데, 그 곁에서 겨울을 희롱하듯 노란 불꽃이 환하다. 복수초 잎맥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햇빛이 풍성하다.

복수초는 철저한 향일성(向日性)이다. 날이 흐리면 잎을 닫아버리고 해가 날 때 낯을 보인다. 아직 봄이 오기도 전인데 저리 피어난 것도, 쌓인 눈을 제 몸의 열기로 녹이고 기어이 뚫고 나오는 것도, 다 저 햇빛 때문이다. 복수초처럼 키가 작은 야생화들은 봄이 와서 주변에 키 큰 풀들이 자라나면 금방 묻혀버려 햇빛을 차지할 기회가 사라진다. 미리 피어나 부지런히 열매를 맺은 뒤 키 큰 경쟁자들이 등장하면 조용히 퇴장하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노랑앉은부채, 너도바람꽃, 변산바람꽃 같은 야생화도 복수초와 운명을 함께 한다.

▲ 하동군 악양면 박남준 시인 집 앞마당에서 복수초가 돌확의 얼음을 희롱하고 있다.

티베트 산악지방의 '노드바'라는 약초는 히말라야 만년설 바위틈에서 꽃을 피울 무렵이면 3~4m나 쌓인 주변의 눈을 녹여 버린다. 복수초도 눈 덮인 산속에서 제 몸의 열기로 눈을 녹여 세상에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눈 속에서 핀다고 하여 '설연화(雪蓮花)', 얼음 사이로 피는 꽃이라서 '빙리화(氷里花)'나 얼음새꽃, 새해 원단에 피는 꽃이라 '원일초(元日草)'로 불린다. 복수초는 봄의 전령사로 지나치게 편애를 받는 꽃이기도 하다. 복수초는 씨앗에서 싹을 틔운 뒤 6년이나 지나야 겨우 꽃을 피운다니 대접받을 만도 하다. 반복되는 긴 겨울의 고통을 이겨낸 힘이 가상하다. 동양에서는 복(福)과 수(壽)를 주는 행운의 꽃이지만, 서양에서는 그리스신화 속 아도니스의 환생으로 여겨 '슬픈 추억'을 상징한다.

박남준 시인이 모악산에서 홀로 살다가 하동군 악양면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 오던 17년 전, 저 복수초를 함께 모셔왔다. 물론 우리 산천에 여기저기 피어나는 복수초이지만, 정든 모악산 꽃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앞마당 화단에까지 저리 이쁘게 자리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악양으로 이사 올 때가 가을이어서 땅속으로 숨어버린 오래 정든 존재를 찾지 못하다가, 이듬해 이른 봄에 다시 찾아가 얼굴을 내민 저 분들을 모셔왔다고 했다.

"한 이틀 집을 비웠다 돌아왔더니 마당 앞에 복수초꽃 한 가지 어느 누구 불청객이 꺾어 버렸는지 목이 잘린 채 돌절구 속에 떨어져 있다. 속이 상해서 한동안 들여다보다 작은 웅덩이 가에 꽂아둔다. 몹쓸 사람 같으니라고 그냥 보고 갈 일이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으면 곱게 갈 일이지. 사람이 산다는 일도 때로 숨을 다하여 피워 올린 꽃송이처럼 그러나 채 다 피워보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송이처럼 허망한 일이 일어나는 때가 한두 차례뿐이겠어 하고 여기니 새삼 살아 있는 일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 눈부신 것 속에는 눈물겨움이 있다고 시인은 썼다.

산속에서 최소한의 양식만으로 세 끼를 해결하고, 빗소리 함박눈 봄꽃 낙엽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모악산 시절, 박남준 시인이 산방일기 '꽃이 진다 꽃이 핀다'에 기록한 대목이다. 그는 결혼한 적도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는 만년 노총각 홀몸으로 산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았다. 저 산방일기로 인해 산 속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곳 악양으로 떠나왔다. 홀로 수도하듯 살아가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한창훈은 시인의 산문집 발문에 "오십이 넘도록 홀로 스님처럼 지내며 시와 음악과 새소리, 매화를 동거인으로 두고 살고 있다"면서 "삶은 정갈하고 성품은 깨끗하고 몸은 아담하고 버릇은 단순하고 행동거지는 품위 있고 눈매는 깊고 손속은 성실한 데다가 시서에 능하고 음주는 탁월하고 가무는 빛나는 가인"이라고 인물평을 쓴 적 있다. 육십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매년 봄이 시작될 무렵이면 매화를 영접하기 위해 내려가곤 했지만, 올해 만난 시인은 근년 들어 가장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심장병을 앓아 생사의 고비를 넘긴 뒤 새로운 삶의 태도가 마련된 것인지는 모르되, 생계형 노동으로 산문을 쓰다 보니 시가 안 나와 산문을 작파한 뒤 시가 뜻대로 와주어서 그런지는 또 모르되, 시인은 자주 웃었다. 지난해에는 미황사 금강스님과 함께 인도에도 다녀왔다. 바라나시 강가에서 개들이 화장터에서 사람 수족을 물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망연히 앉아 있었다. 예전에는 여행을 다녀와도 시로 남기지 않았는데, 이즈음은 관조적인 태도로 관찰하고 시를 짓게 된다고 했다.

▲ 청매화가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하는 지리산학교 돌담 곁 박남준 시인.

대보름달이 밝은 밤의 섬진강변을 달려간 악양의 집에서, 시인이 밤을 새워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과 막걸리를 마시며 들려준 이야기들을 여기에 다 적지는 못하겠다. 그가 그 밤에 최근 찾아왔다는 시 한 편을 낭송했는데, 여유로워진 표정을 보여준 이유를 알만도 하겠다.

"불시착의 연속에 있었다/ 바오밥나무들이 점등을 시작한/ 비상활주로의 길 끝에 사막은 시작되었다/ 사막이 공간이동으로 뛰어든 이유는/ 불시착의 그 처음이 발단이었다는 정도로 생략하겠다/ 그리하여 그리움이 사막을 메아리쳤다// 파상공세를 시작한 풀들에 쫒겨/ 앞마당에 왕마사를 깔고부터였다/ 사락사막/ 발자국소리마다 사막이 전염되어 불려나왔다/ 불시착한 철새들의 울음이 묻혀있었다/ 홍그린엘스 노래하는 모래산이라는/ 남고비사막의 첫 밤처럼 저녁이 드리워지고/ 곧 하늘이 모자르게 별들이 뜰 것이므로/ 나는 보드카와 방랑의 담요를 두르고/ 사막의 밤으로 누울 것이다"

'어린왕자로부터 쌔드무비'라는 그 시는 이렇게 흘러간다. 마당에 풀들이 무성해 뽑고 뽑아도 파상공세를 당해내지 못하다가, '왕마사'를 깔고부터 발에 밟히는 사각거리는 모래소리에서 시인은 사막과 어린왕자를 떠올린 모양이다. 다시 한창훈의 발문이다. '현대상선 하이웨이호를 타고 인도양 건너 아라비아 사막에 섰을 때는 살이 찐 관계로 소혹성 B612호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기도 합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밤하늘 저 높은 곳만 아련하게 올려다봅디다.' 늙은 어린왕자는 마당에서 사막을 떠올리고, 이 별에 불시착한 운명을 돌아본다. '보드카와 방랑의 담요를 두르고' 밤하늘을 응시한다.

▲ 아직 황량한 대지에서 경쟁자들을 피해 봄이 오기 전 먼저 피어나, 노란 불꽃처럼 일렁인다.

"밤하늘에는 불시착을 한 채/ 이 별에서 살아온 시간이 상영될 것이다/ 오오오 쌔드무비♬~/ 서툰 배역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고통스러웠다/ 잔기침쟁이 장미와 사막여우처럼/ 길고양이 룰랄라도 충분히 길들여진 채/ 이 별의 적응기를 끝냈으므로 나를 떠나갔다 하여 / 염려하지 않기로 한다/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는 것을 안다/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엔딩자막이 올라오며 불시착의 활주로에/ 꽃을 피우지 못해 울던 세상의 모든 꽃들이/ 만개하는 장면으로 끝날 것이다"

꽃을 피우지 못해 울던 세상의 모든 꽃들이란, 육년이 넘도록 꽃을 피우기 위해 어두운 땅속에서 노심초사하는 복수초 같은 꽃들만이 아니라, 곧 생의 엔딩 장면 앞에 설 나일 수도 있다.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는 것은 나도 안다. 내게도 서툰 배역은 내내 힘들었다. 복수초를 만나러 갔다가, 쌔드무비를 보았다.


UPI뉴스 / 하동=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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