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일순간 차갑던 회색 도시에 색채를 입히더라"

임종호 / 기사승인 : 2020-02-11 10: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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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거장 밥 제임스의 아티스틱 컨설턴트 레이첼 곽
"당신이 있어 좋은 프로젝트 돼" 말에 가슴 벅찬 보람
"세상의 정신적 풍요 위해 누군가는 예술 해야, 그게 나"
▲ 재즈 거장 밥 제임스(Bob James)의 아티스틱 컨설턴트(Artistic Consultant) 레이첼 곽(곽능희 백석대 실용음악과 교수). [본인 제공]


음악 이야기를 꺼내자 차분했던 미소와 눈빛이 용광로처럼 달아오른다. 쉼 없이 이어지는, 열정 넘치는 수다(?)는 기자를 압도한다.

레이첼 곽. 재즈 거장 밥 제임스(Bob James)의 아티스틱 컨설턴트(Atistic Consultant·예술자문가)다. 한국 이름 곽능희. 백석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이기도 하다. 바쁜 강의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전 세계를 오가며 밥 제임스와 함께하는 기념비적인 프로젝트는 곽 교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언제부터인가 K팝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팝 음악 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재즈 분야에서만큼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인에게 재즈라는 분야는 아직 어렵고 낯선 게 사실이다.

미스터리 같은 열정과 재능으로 세계 재즈계에 모습을 드러낸 곽 교수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 분야에서도 또 다른 한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스친다. 그 만큼 지난 8일 인터뷰 내내 곽 교수는 열정넘치는 모습이었다.

한국인이 재즈 거장의 '아티스틱 컨설턴트'로 활약하는 것에 마니아들의 관심이 높다. 밥 제임스와의 인연을 소개해 달라.

"밥과의 첫 만남은 2005년이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나는 밥 제임스다. 당신을 공연에 초대하고 싶다'는 말이 수화기로 들려왔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됐다. 나중에 알게 됐다. 내가 쓴 12음계 재즈곡을 차에서 듣게 된 밥 제임스가 나에게 관심을 두게 됐다는 것을. 'Who is that crazy composer?···Rachel Kwag? She is genius!(와우! 기막힌 걸? 대체 작곡가 이름이···레이첼곽? 천재로군!)' 그날 그와의 통화는 마법 같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ㅡ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했나.

"2019년 1월 세계 유명 악기 제조업체인 일본 야마하(Yamaha)가 진행한 밥 제임스의 MCL(Musician's Creative Lab)에 참여했다. MCL은 야마하가 세계 거장의 뮤지션과 함께 만드는 음악교육용 비디오 콘텐츠다. 나는 당시 자문인 자격으로 처음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몇 시간이 지난 후 작업의 전반적인 콘셉트나 콘텐츠를 구성하는 등 풀스토리를 엮는 일을 전담하게 됐다. 음악 뿐만 아니라 영상 구성에도 참여했다. 말하자면 나의 역할은 음악과 영상을 아우르는 콘텐츠 전반에 대한 프로듀싱이었다."

ㅡ결과가 성공적이었나.

"작업 후 야마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높은 기여도를 인정해 괜찮다면 자문이 아닌 공동프로듀서(Co-Producer)로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리고 싶고 추가 인센티브도 지급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동안 해당 프로젝트의 마케팅을 영어와 일어권에서만 진행했지만, 한국인인 내가 참여한 계기로 한국 마케팅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는 반가운 내용이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거장과 함께한 시간이라 행복했다. '당신이 있어 좋은 프로젝트가 됐어'라는 밥 제임스의 말에 가슴이 터질 듯한 보람을 느꼈다."

▲ 2019년 1월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밥 제임스 스튜디오에서 레이첼 곽이 밥 제임스와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다. [본인 제공]


ㅡ밥 제임스의 여러 앨범에 참여했다는데.

"2018년 에스프레소 앨범에 참여했다. 이 앨범에는 총 4곡이 수록됐다. 앨범 초기부터 다양한 역할을 했다. 처음엔 작품의 모티브를 듣고 걸맞은 다양한 제안을 했다. 본격적인 작업 과정에서는 작품을 모니터링하며 수정 사항이나 연주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이 앨범에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Creative Consultant)란 타이틀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지난해 9월에는 프랑스에서 있던 그의 또 다른 앨범에도 참여했다. 이 작품은 밥 제임스와 독일인 트럼펫 주자 틸브뢰너(Till Bronner)가 공동으로 작업한 앨범이다. 나는 작곡가로서 힘을 보탰다. 앨범에 참여한 것 자체로도 영광스러웠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왜 이들이 세계적인 아티스트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올해 전 세계에 공식(소니뮤직)출시된다.

지난해부터 나의 공식 직함은 '밥 제임스의 아티스트 컨설턴트'로 상향됐다. 최근 진행된 밥 제임스의 일본 투어(동경·요코하마· 나고야)에서도 그에게 다양한 음악적 조언을 할 수 있었다. 바쁜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ㅡ음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거창하지 않다. 나는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발레나 바이올린 등 보거나 듣는 것을 잘 따라 했다. 어느 날 재주 있는 넷째의 미래를 놓고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습겠지만 이날 나의 미래는 거수로 결정됐다.

결론은 피아니스트였다. 방과 후엔 언제나 피아노 학원을 향했다. 집에 돌아와선 소리 안 나는 종이 건반을 치며 미래를 꿈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 나는 가방 피아노'를 손에 쥐고 퇴근한 아버지를 보고 나는 감격의 비명을 질렀다.

성인이 돼 미국 버클리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사실 한국 사회는 학업에 있어 우열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홉을 잘해도 부족한 하나를 두고 지적을 하기도 한다. 나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곳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을 격려해 주는 스승 덕분에 부족한 점을 하나씩 채워 나갈 수 있었다. '창의력 좋다. 타협하지 않는 너의 성향은 작곡가로서 매우 큰 강점이 아닐 수 없다!'라는 교수님의 격려는 당시 젊은 음악학도인 나에게 큰 힘이 됐다."

ㅡ음악인의 삶은 어떤가.

"사실 대부분 예술이 그렇듯이 음악도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쉬운 분야는 아니다. 이런 문제는 늘 예술인이 겪는 고민거리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왜 음악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상념에 젖어 드라이브하고 있었다. 문득 보니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를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회색빛 도시에 '왜 이렇게 도시가 삭막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다. 도시의 회색빛이나 정형화된 모습도 문제였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차 안에 음악 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카 오디오를 틀자 차갑던 회색 도시는 일순간 다양한 색채로 덧입혀졌다. 나는 그때 '아! 이것이 음악이구나. 이것이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ㅡ예술은 누가, 왜 해야 하나.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정신적 풍요'를 위해 누군가는 예술을 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나일 뿐이다. 하지만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만큼은 한마디 거들고 싶다.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돈과 명예만을 원한다면 더 쉬운 길도 있다고."

ㅡ음악 아닌 다른 힐링 포인트가 있는가.

"그림을 자주 그린다. 음악과 미술은 쌍둥이다. 음악 작업을 할 때 문득 다양한 색감이 떠오르곤 한다. 산다는 것은 규범 속의 연속이다. 어쩌면 답답할 수 있는 일상들. 나는 그림을 그리며 이런 일상에서 탈출한다. 안에 숨겨진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음악은 오히려 전공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비전공자인 나는 두려울 것도 없고 자유롭기만 하다. 나의 그림은 숨겨진 내 이야기고 나를 다시 채우는 힐링 포인트다."

ㅡ올해도 밥 제임스와의 다양한 프로젝트가 있을 텐데.

"공동 앨범을 제작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의 또 다른 앨범에도 프로듀서로 참여해야 한다. 야마하로부터 다음 프로젝트 제안도 받았다. 바쁘겠지만 부지런히 뛰려 한다. 올해는 사람과 사람, 대중과 문화를 연결하는 통로나 창구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고 싶다. 누구나 주인공이길 원한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작지만 그런 통로가 되고 싶다."

ㅡ마지막으로 UPI뉴스 독자들에게 밥과 함께한 작품 하나를 추천한다면.

"Waltz For Benny. 나의 곡이다. 물론 피아노는 밥 제임스가 연주했다. 버클리음대 유학 시절, 첫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다가 창밖을 보았다. 고요하고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은 지친 몸과 마음을 일순간 바꿔 놓았다. 이 곡은 '왈츠를 추는' 나와 아이의 숨결을 담은 곡이다."

UPI뉴스 / 임종호 기자 yim@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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