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 칼럼] '가스라이터'에 노예가 되는 사람들

이원영 / 기사승인 : 2020-01-29 15: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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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예속화 부르는 가스라이팅
보이지 않는 폭력에 깊은 상처 받아
자존감 잃지 않고 용감히 대처해야

느닷없는 영어 단어 하나가 사람들에 회자한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다.

"원종건은 여자친구였던 저를 지속해서 성 노리개 취급해왔고, 여혐과 가스라이팅으로 저를 괴롭혀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청년 인재로 야심 차게 영입했던 원종건(27) 씨를 겨냥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 글에서 나온 말이다. 원 씨의 여자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온라인에 이런 글을 올려 파장이 커지자 원 씨는 총선 출마를 포기하고 하차했다.

이 여성은 가스라이팅으로 고통당한 사례를 설명하면서 "(내가) 허리를 숙였을 때 쇄골과 가슴골이 보인다며 매일 저한테 노출증 환자라고 했다. 반바지를 입는 날엔 온종일 제게 화를 냈다"고 썼다.

이 글이 퍼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그녀가 당했다는 '가스라이팅'에 주목했다.

가스라이팅이란 말은 70여 년 전 영국 영화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됐다. 이 영화에서 남편은 상속받은 아내의 유산을 빼앗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상황조작을 꾸민다.

아내가 남편의 외출 후에는 가스등이 흐려지고 다락방에서 발소리가 나서 두렵다고 호소하자 남편은 "당신이 너무 예민해서 그래. 착각이야"라며 아내의 잘못으로 몰아간다.

남편이 선물한 브로치를 잃어버리는(사실은 남편이 숨겼다) 일도 발생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내는 정말 자기가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점점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간다.

이 영화의 제목을 활용해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Gaslight Effect(가스등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를 탄생시킨 것.

지속적인 강요와 협박으로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밀어붙여 마침내 상대방이 '정말 내가 문제인가'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정신적 예속상태를 만들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어로 '노예화'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가스라이팅과 오버랩 되는 단어가 떠오를 법하다. 그렇다. '갑질'이다. 가스라이팅이 뭔가 좀 교묘한 느낌인 데 반해, 갑질은 좀 우악스럽게 들리긴 하지만 벗겨놓으면 그게 그거다.

갑질러(갑질하는 사람)들이나 가스라이터(가스라이팅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이런 정서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잘못하고 있으며, 문제가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질한다.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가스라이팅 행위를 그칠 기미가 없다. 상대방은 지쳐가고, 판단력이 흐려지고, 급기야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노예화'의 길로 접어든다.

가스라이팅이 남녀관계에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집안에서, 직장에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고, 형태로 자리 잡고 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다만 한 쪽은 범죄 의식이 없고, 한쪽은 노예화되어 있을 뿐. '불행의 제도화'다.

며칠 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흥미로운 기고가 실렸다. 정신건강 전문가인 스테파니 사키스 박사가 '켈리와 폼페이오;기자는 어떻게 가스라이팅에 능란하게 대처했는가'라는 제목의 글이다. NPR 방송의 메어리 켈리 기자가 '갑질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대하는 장면은 모든 분야의 가스라이터들을 다루는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자신이 원치 않는 질문을 하는 켈리 기자에게 호통치고, 욕하고, 모욕하고, 위협하는 방법으로 갑질을 남발했다.

사키스 박사는 "그런데도 켈리 기자는 굴하지 않고 차분하고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고, 논점을 흐리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지 않았다"며 "켈리 기자는 (어느 분야이든) 조종하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결국 가스라이팅에 당하면서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은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는 것밖엔 기댈 데가 없다. 무수한 가스라이팅 앞에서 무력하게 노예화되는 길을 선택한다면 사람의 숨통을 막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은 앞으로도 계속될지 모른다.


폼페이오 장관이 사무실로 따로 불러 언성을 높이고 "두고 보자"는 식으로 겁을 주었는데도 켈리 기자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그 상황을 녹음과 증언으로 낱낱이 고발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완패였다.

켈리 기자처럼 용감하고 자존감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곳곳에 있는 '가스등'을 꺼트려야 하겠다.

▲ 이원영 사회에디터


UPI뉴스 / 이원영 기자 lw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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