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나는 나비를 꿈꾸는 한 마리 파리"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1-16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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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열두 번째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올린 진솔한 상념과 어휘
'사물의 언어'를 느끼고 전달하는 명징한 감각
▲생의 치열한 현장에서 길어올린 상념을 서정적으로 갈무리해온 이재무 시인. 열두 번째 시집을 펴낸 그는 지난해 여행길에서 만난 데스밸리에서 "인간 문명의 허위와 가식이 침범할 수 없는 원초적 순수 생명의 세계를 보았다"면서 "내 지난 날의 습기 많은 생을 묻었다"고 썼다. [천년의시작 제공]


"빙하기의 들소는 달리다 멈추면 얼어 죽기 때문에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달리면서 이끼를 뜯어 배를 채우고 달리면서 잠을 자야 했다.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 들소는 선 채로 얼음 조형물이 되었다. 지금 이곳 새로 도래한 빙하기를 달리는 들소 떼들은 힘을 아끼느라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있다."('빙하기 들소')


살아 있는 한 달려야 하고, 달리면서도 죽지 않기 위해 먹어야 하는 존재가 어디 빙하기 들소뿐일까. 빙하기를 지나 수백만 년이 흘렀어도 치열한 생존의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멈추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이 시인의 눈에는 밟힌다. 시인은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저 빙하기의 들소들을 본다.


"바퀴는 쓸모를 다한 뒤에야 눕게 된다는 점에서 말과 나무를 닮았다. 서서 먹고 서서 걷고 달리다가 서서 쉬고 잠자다 죽어서야 눕는 종족들. 나는 출근길에서 서서 먹는 사람과 퇴근길 전동차 안에서 서서 자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서서 자는 사람들')

서서 먹고 서서 자는 사람들, 죽어서야 비로소 눕는 저 종족들은 멸종된 게 아니었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올린 상념을 진솔한 어휘로 시에 담아온 이재무(62)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를 펴냈다. 이번 시집에는 달리기 경주 같은 삶의 비애를 비롯해 시인 특유의 재치와 위트가 빛나는 시편들, 죽음에 대한 성찰까지 포함하는 '이재무표' 시들이 집약돼 있다.


"연애 실패 후 나는/ 자살을 꿈꾸기도 하였는데/ 다리 밑 대청댐에서 흘러내려 온// 강물은 옛날의 위용을 잃고 기신기신/ 흐르고 내 청춘의 의붓어미/ 같은 이곳은 지날 때마다 아픈/ 추억이 자꾸만 덧나는데"('기차가 신탄진역을 지나고 있다' 부분)


이재무는 "내가 살아온 삶의 역사, 가족 서사가 바로 내 시"라고 언명하거니와, 어쩌다 다시 스치는 '내 청춘의 의붓어미 같은' 그곳은 아픈 추억을 자꾸만 덧나게 한다. 비가 오면, "오늘 저녁은 비가 와서 어둠이 근친처럼 살갑고 먼 곳의 네 얼굴조차 가차이에서 환하다"('김치찌개')고 그 추억을 애잔하게 되작인다. 마음이 아프고 추억이 다양한 빛깔로 기억 속에서 변주되는 건 바로 '너'라는 운명 때문이다.

"강은 강물이 구부린 것이고// 해안선은 바닷물이 구부린 것이고// 능선은 시간이 구부린 것이고// 처마는 목수가 구부린 것이고// 오솔길은 길손들이 구부린 것이고// 내 마음은 네가 구부린 것이다"('구부러지다')


그런 것이다. 강물이, 해안선이, 능선이 제가 휘어지고 싶어서 구부러진 게 아니듯 시인의 마음도 그러한 것이다. 적어도 그렇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시인의 마음은 사물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인에게는 사물이 느끼는 감정과 말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가물어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는 "몸피가 자꾸만 줄어드는 저수지// 아침에 삼킨 소량의 풍경// 오후 들어 헐떡이며 게워내고 있다"('가뭄')고 그려내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가을 나무는 "떨굴 것은 떨구고 털 것은// 털어낸 뒤 맨몸 맨정신으로// 피정 가는 수사처럼// 시간의 먼 길을 떠난다"('가을 나무')고 묘사한다. 그가 말하는 '사물의 언어'들이다.


"왜 있지?// 시골 옛집 창호지 바른,// 한밤중 달빛 흘러와/ 벽면에 벽화를 치고// 산에서 뛰쳐나온 새 울음이// 구멍도 없는데/ 방바닥으로 또르르 굴러오고// 마실꾼 발자국 소리도/ 환하게 들려주는,// 그러나 마파람 고집은 들이지 않는,// 한가운데 손바닥 크기의/ 창窓을 내어/ 바깥 동정을 살피게 꾸민,// 그런 문// 내 몸에 내어 살고 싶다"('문')


옛 시골집에서 문을 열지 않고도 바깥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구멍처럼 달았던 작은 사각 거울을 두고 묘사하는 저 시는 사물과 교감하는 이재무 특유의 명징한 감각을 웅변한다. 자신의 몸에도 손바닥만한 창을 내어 세상을 보고 듣고 싶다는 바람은 득의의 결실이다. 한밤중 달빛과 벽화, 새 울음과 마실꾼 발자국 소리 들을 가슴 속에서 보거나 듣지 못했다면 얻어낼 수 없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이재무 시인은 "내가 살아온 삶의 역사가 나의 시"라면서 "삶의 보폭과 시의 보폭이 서로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나란히 가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천년의시작 제공]


"매번 고인께는/ 면목 없고 죄스러운 말이지만/ 장례식장에서 먹는/ 국밥이 국물에 만 밥을 허겁지겁/ 먹다가 괜스레 면구스러워 슬쩍/ 고인의 영정 사진을 훔쳐보면/ 고인은 너그럽고 인자하게/ 웃고 있더라/ 마지막으로 베푸는 국밥이니/ 넉넉하게 먹고 가라/ 한쪽 눈을 찡긋, 하더라/ 늦은 밤 국밥 한 그릇/ 비우고 식장을 나서면/ 고인은 벌써 별빛으로 떠서/ 밤길 어둠을 살갑게 쓸어주더라"('국밥')


장례식장에서 국밥을 먹으며 고인과 교감하고, 밤길 하늘에서 스스로 얻는 살가운 위로는 어떤가. 이번 시집 표제에는 이례적으로 수록 시편에는 없는 '데스밸리'를 끌어왔다. 지난해  LA여행 체험을 활용한 것인데, 그는 "여행자와 동물이 쓰러져 죽기도 한다는 데스밸리에서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원始原을 보았다"면서 "내 지난날의 습기 많은 생生을 묻었다"고 서두에 썼다. 죽지 않고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재무는 "나는 60년째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저 멀리 돌아갈 집은 아득하지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집에 당도할 때까지 울지 말아야 한다."('귀가')고 다짐한다. 그는 새 시집 출간을 축하하는 지인들과 만난 저녁에 "나에게 '귀가'란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언뜻 말했다. 생의 전선에서 누구보다 가열차게 살아온 이재무의 꿈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이런 절창은 어떤가.


"나비는 소리가 없지만 파리는 시끄럽다/ 나비는 현실과 꿈을 넘나들지만/ 파리의 실존은 꿈 바깥에 있다// 나비는 하늘을 편애하지만/ 파리는 지상을 고집한다// 나는 나비를 꿈꾸는 한 마리 파리/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부산스럽게 붕붕거린다"('나비와 파리' 부분)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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