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막으면 고이고, 외면하면 더 깊은 심연으로 흐르는…"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1-02 10:26:46
  • -
  • +
  • 인쇄
'문학동네' 전 대표 강(태)형 첫 소설 '온전한 고독'
'길을 잃고 여행을 시작한' 오래된 시인의 길찾기
유령과 설화로 풀어내는 집착과 욕망... 고독

묘지가 놀이터이고 집이고 삶터인 남자가 있다. 이 묘지관리인 노인 피터 토레스는 일찍이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일곱 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묘지관리소에서 살았다. 초등학교만 바깥으로 다녔을 뿐, 이후로는 줄곧 묘지를 벗어난 일이 없었다. 묘지가 세상의 전부였다. 묘지를 청소하고 일몰 전 종을 흔들며 사람들을 묘지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하며 단순하게 살아왔다. 그에게 젊은 형사 마틴 브레스트가 찾아와 오래 전 이 묘지에서 일어난 여자의 사망 사건에 대해 묻는다. 바야흐로 피터가 이 사건에 대해 말하고 마틴이 듣는 칠일 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낮달이 떴다. 작고 하얀 낮달은 한낮 햇빛 속을 배회하는 유령처럼 흐리게 보였다. 그는 묘지관리실 앞에 서서 낮달을 무연히 바라보았다. 묘지관리실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서 멀리 보이는 숲과 그 위의 작은 구름과 구름 위를 천천히 떠가는 낮달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관리실을 향해 올라오는 기척이 있었지만 그는 달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그를 찾아온 게 언제 적 일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 젊은 날 시인으로 등단한 뒤 오랜 편집자 생활을 거쳐 '강형'이란 필명으로 다시 글쓰기 업을 시작한 '문학동네' 전 대표 강태형(본명 강병선)씨. [강태형 페이스북]


쓸쓸한 매혹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장편 '온전한 고독'(난다)은 '신인 작가' 강형(63)이 펴낸 첫 소설이다. 유령들을 불러들이고 설화를 접목시켜 욕망과 집착을 말하는 이야기이자, 누구나 살아 있기 때문에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독'의 정점을 보여주는 서사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나'라는 아이가 묘지로 피터를 찾아왔다. 비어 있어 맑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한나는 수정구슬에 갇힌 유령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한나를 리즈라는 마법사 엄마가 입양해 수정구슬에 가둬버렸다. 이 과정이 잔혹하다. 항아리 속에 한나를 넣고 굶기다가 하얀 가루를 주었는데 정신없이 핥고 보니 소금이었다. 갈증에 사로잡힌 한나가 간절하게 물을 원할 때, 엄마는 물방울처럼 보이는 수정구슬을 넣어준다. 한나는 "목마른 영혼이 커다란 물방울이라 착각하고 간절하게 핥고 핥다가 품에 안고 죽은 구슬이고,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울면서 갈 곳을 잃은 영혼이 그 구슬 속으로 들어간 거"라고 수정구슬에 갇힌 사연을 털어놓는다.

 

"어떤 장소에 붙들린 영혼은 지박령, 어떤 사람한테 붙들린 영혼은 인박령이라고 해요. 집착은 스스로 붙들리는 거예요. 사람이든 유령이든 어딘가에 붙들리면 거기에 갇혀요. 불행하게도, 스스로 갇히는 거죠."

 

유령을 볼 줄 아는 '영혼이 맑은 바보' 피터에게 다양한 사연을 지닌 묘지의 여자 유령들이 몰려들어 한나를 구출할 방도를 논의한다. 이들은 과연 한나를 구해낼 수 있을까. 여자 유령들의 각자 사연은 어떤 것일까. 카타리나 사망 사건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을 죽게 만든 '오컬트 살인사건'이라고 젊은 형사는 나중에 정리하는데, 집착과 욕망에 대해 섬뜩하게 경고하는 이 서사는 어떻게 풀려나갈까. 카타리나 사망 이후 묘지에서 홀로 늙어온 피터의 고독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죽어서도 지상을 떠나지 못한 유령들과 고독한 노인 피터를 빌려, 작가 강형은 어떤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까. 소설의 마지막에도 반전이 있지만, 이 작가의 정체야말로 큰 반전이다. 1990년대 초반 태동시켜 한국 문학판의 지형을 바꾼 출판사 '문학동네'의 전직 대표 강태형(본명 강병선)이 작가 강형이다. 5년 전 출판사에서 손을 떼고 물러난 뒤 유럽과 남미를 떠돌며 '글 쓰는 자'의 삶을 궁구해온 그의 첫 결실이 이번 소설이다.

 

애초에는 남종선(南宗禪)의 개창자 육조혜능의 설법을 기록한 경전 '육조단경'을 붙들고 200자원고지 2000장 넘는 분량의 장편을 목표로 집필하다가, 이 소설이 찾아와 리스본에서 40일 만에 탈고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길을 잃고 여행을 시작'하면서 떠돌다가 갈라파고스에 이르러 하늘을 가르는 긴 은하의 강을 올려다보며 "내 어린 날의 꿈, 글 쓰는 자의 생을 꿈꾸어도 괜찮겠다"고 다짐했다고 썼다.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겨울새'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강태형은 남의 글을 매만지고 출간하는 오랜 편집자 생활을 거쳐 소설가로 다시 글쓰는 자의 생을 시작했다. 지난해 9월 가명으로 이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하고 편집자와 교류하다, 꼼꼼하게 원고를 다시 손보아 12월 23일 책을 선보인 뒤 곧바로 다시 출국했다. 메신저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답은 길지 않았다.

▲첫 소설을 펴낸 뒤 곧바로 스칸디나비아 오지로 떠나 눈덮인 묘지에 선 소설가 강형. '길을 잃고 여행을 시작한' 그는 남극에서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글 쓰는 자의 생을 다시 꿈꾸어도 괜찮겠다"고 다짐했다. [강태형 제공]

 

"저는 지금 스칸디나비아 오지를 떠돌고 있어요. 넘 춥고 힘들어서 아무 정신이 없어요. 노트북 한번 열어보지 못했어요.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질문을 늘 바라보고 다닐게요. 혹 답변이 떠오르면 보내드리겠습니다만… 자신이 없네요."

 

오후 세시 무렵이면 해가 지는, 춥고 우울한 북구의 오지로 서둘러 떠난 그에게 사진을 요청했더니 눈 덮인 묘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살아 있지만 세상과 절연한 채 묘지를 벗어나지 않는 삶은 죽은 자의 고독과 어떻게 다를까. 피터는 정작 고독 안에서 오히려 평화로운 것 같다고 메신저에 타이핑했을 때,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묘지가 좋았어요. 저는 묘지기 피터의 고독을 바라보았는데, 읽은 이들은 각각 다르더군요. 항아리에 갇혀 죽은 한나의 고독을 이야기하는 분도 있고, 수백년 동안 지상을 떠도는 마거릿의 고독에 눈을 준 이도 있었어요. 저는 살아가는 자의 고독이 더 무겁고 무섭다고 생각해요. 삶은 그 모든 감정, 감각을 생생하게 하니까요."

 

죽음을 친구 삼아 단순하고 무료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피터에게도 가슴 속에 오래 품어온 그리운 여인이 있었다. 죽은 여인의 관을 열어 눈가에 입을 맞추며 오열하는 피터는 "그리움은 물과 같다"고 진술한다. 가로막으면 고이고, 잊으려 외면하면 더 깊은 심연으로 흘러가는 물.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뉴스댓글 >

핫이슈

만평

2020.04.01 00시 기준
9887
165
5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