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역사 왜곡의 뿌리 '역사교육 의원모임'과 '일본회의'

김당 / 기사승인 : 2019-08-03 17: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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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의도된 역사전쟁] ③ 아베 역사전쟁의 진앙
아베 역사관의 뿌리는 '새역모' 지원한 '역사교육 의원모임'
다른 한 축은 '아름다운 나라 일본' 지키는 '일본회의'

일본은 신(神)의 나라다. 사무라이의 나라다. 천황(天皇, 왕)을 정점으로 막부(幕府)의 쇼군(將軍)과 번(藩)의 영주인 다이묘(大明)가 싸우고, 번과 번의 사무라이들끼리 전투를 벌였다. 수많은 전쟁에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수많은 원혼이 구천을 떠돌았다. 진혼이 필요했다.


▲ 야마구치현 하기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옛집과 생가 터. 1)옛집의 일부는 쇼카손주쿠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강의실이다. 2)쇼카손주쿠 뒤쪽, 쇼인이 하기에 강제 송환되었을 때 갇혀 있던 곳(표시 부분)으로 그는 이곳에서도 강연을 했다. '쇼인 신사'가 이 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3)2의 표시 부분 내부. 4)쇼인의 생가 터. [출처 〈에도의 여행자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 마침내 264년 만에 에도(江戶) 막부가 무너졌다. 왕정 복고다. 일왕 메이지는 이듬해(1869년) 막부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 지내기 위해 도쿄 쇼콘샤(招魂社)를 설립했다. 막부 타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설파하고 실천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과 수제자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1839~1867)가 이곳에 처음으로 합사되었다.

쇼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내각 총리대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고,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인 신사쿠(晋作)는 아베가 고교시절 야마구치현의 신사쿠 묘를 참배하고 그의 이름에서 신(晋)자를 따올 만큼 ‘오마주’의 대상이었다.

메이지유신 주도 세력끼리 전쟁도 벌였다.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西南) 전쟁(1877년)에서도 원혼이 난무했다. 일왕은 쇼콘사를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1879년)했다. 야스쿠니(靖國), 곧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염원을 담았다.

그것은 일본 내부만의 평화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한론(征韓論)으로 무장한 쇼인의 제자들은 야수의 발톱을 밖으로 향했다. 내전 때보다 더 많은 황군이 구천을 떠돌았다.

야스쿠니에는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支那事変, 1937~1945),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1941~1945) 등 "국난(國難)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친 246만6000여 명"(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의 위패가 모셔졌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도 포함돼 있다.

'친한'과 '극우' 두 얼굴의 정치인, 나카소네와 아베


▲ 2013년 8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 주창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기리는 '쇼인 신사'에 참배하는 아베 신조 [뉴시스]


아베 총리는 2013년 8월 13일 2차 아베내각 당시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쇼인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공물 봉납을 통해 대리 참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2월 26일 야스쿠니를 전격 참배했다. 아베 개인으로서는 2차 아베내각 구성 1주년을 맞이한 날이다.

아베는 1차 아베내각(2006년 9월∼2007년 9월) 때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못한 것을 '통한'이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참배 후 기자들에게 "일본을 위해 귀중한 생명을 희생한 영령에게 존숭(尊崇)의 뜻을 표했다"면서 "중국, 한국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말했다. 병 주고 약 주기였다.

일본 현직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한 것은 2006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이후 7년 만이었다. 아베는 당시 "총리가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참배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다음 총리도, 그다음 총리도 당연히 참배하기 바란다"고 했다. 아베는 그 뒤로 직접 참배 대신에 공물 봉납을 통한 대리 참배를 하고 있다.

그에 앞서 1985년에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를 공식 참배했다. 일본 극우파의 우두머리로 불리는 이유다. 나카소네는 아베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인물이다.

나카소네는 아베 집안과 악연과 선연이 겹쳐 있다. 1982년 11월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大郞) 외상은 나카소네와 총리직 대결에서 패배해 결국 총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59년에 나카소네 의원을 처음 입각시킨 사람은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였다. 


▲ 박정희와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오른쪽). 총리 시절(56~60년)에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오늘의 미-일 동맹체제를 굳힌 기시는 동생인 사토 총리 시절에 막후에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여해 나중에 박정희로부터 일등 수교훈장을 받는다. [대한뉴스]


기시는 총리 시절(56~60년)에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오늘의 미-일 동맹체제를 굳혔다. 기시는 동생인 사토 총리 시절에 막후에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여해 나중에 박정희로부터 일등 수교훈장을 받는다,

나카소네는 '친한파'이자 '극우파'이다. 한국인에게 '두 얼굴의 정치인'이다. 1983년에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현안이던 경협차관(40억 달러) 지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1985년 8월 15일, 총리로는 최초로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해 일본 정치인들에게 참배의 물꼬를 텄다.

나카소네가 쓴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은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헌법을 고치고, 교육법을 개정해 일본의 정체성을 강화하자는 일본 극우파의 염원을 담은 지침서로 통한다.

역사전쟁과 아베 인생의 전환점, 82년 '제1차 교과서 파동'

나카소네 내각이 들어선 1982년은 동북아 역사전쟁의 분기점이 된 해다. 아베 개인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아베는 외조부 기시가 권고한 세이케이(成蹊) 소학교에 입학해 중-고교와 대학까지 다녔다. 세이케이학원은 부유층 자녀나 정치가 자제가 많이 다니는 사립 명문학교이다. 아베는 1977년 세이케이대(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남캘리포니아대를 중퇴했다. 1979년 4월 일본으로 돌아와 고베제강에 입사했다.

1982년 11월 총리직 대결에서 패한 뒤 나카소네 내각의 외무상으로 참여한 신타로는 출근하는 아들에게 아베의 외할아버지(기시)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비서관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아베는 고베제강을 퇴사하고 아버지의 비서가 된다. 그때 아베의 나이 28세였다.

'친한파'인 신타로는 나카소네 내각에서 4년 동안 한국과의 관계 개선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고, 그 곁에는 늘 아베가 있었다. 아베는 1991년 신타로가 병으로 죽자 36세에 '보수 왕국'인 야마구치현의 아버지 선거구를 승계한다.

아베가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1982년은 제1차 교과서 파동이 일어난 해다. 그해 6월 고교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문부성이 출판사에 부당한 왜곡(침략→進出, 3.1운동→3.1暴動)을 지시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한국과 중국은 강력히 항의했다. 일본의 진보·양심 세력도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해 8월 미야자와(宮澤) 관방장관은 "일본의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왜곡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11월에는 검정기준에 "근현대사 기술시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의견을 배려한다"는 이른바 '근린제국(近隣諸國) 조항'을 마련함으로써 1차 교과서 파동은 일단락되었다.

미야자와 담화를 계기로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 기준은 ▲교육 내용의 가이드 라인을 설정한 '학습지도요령'과 ▲주변국 입장을 배려한다는 '근린제국 조항'의 두 가지로 정립되었다. 이 조항은 지난 30여년 동안 한일 역사 갈등의 '안전판' 구실을 해왔다.

하지만 일본은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왜곡 교과서를 통해 끊임없이 '교과서 파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1월 28일 문부과학성은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와 센카쿠(尖角, 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못박았다.

독도 일본 영토 명기는 '근린제국 조항'에 대한 사형선고였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의 과거사 3대 담화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인 미야자와 담화를 해체한 것이다. 아베는 이미 2기 내각 구성 전인 2012년 10월 "자민당이 집권할 경우 일본의 과거사 반성 3대 담화를 모두 수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베 역사관의 뿌리는 '역사교육 의원모임'과 '일본회의'


▲ 아베의 절친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전 재무상(YTN 화면 캡처). 1997년 2월 나카가와와 아베는 각각 역사교육 의원모임(歷史敎育 議聯) 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아 교과서 개정운동을 주도했다. 역사교육 의원모임에서 그해 12월에 펴낸 역사교과서의 의문(歷史敎科書への疑問). 젊은 국회의원에 의한 역사교과서 문제의 총괄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아베의 그릇된 역사관의 뿌리는 '새역모'를 지원하는 의원모임이다. 그 토양은 1990년부터 시작된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함께 진행된 일본 사회의 보수화다.

1997년 2월 27일, '새역모'를 지원해온 자민당 소장파 의원 87명이 모여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歷史敎育 議聯, 역사교육 의원모임)이 결성됐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기로 1996년 검정에 합격한 중학교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의 기술이 들어가는 것에 위기감을 가진 자민당 의원들이 모인 것이다.

아베의 절친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전 재무상(2009년 10월 사망)이 회장, 아베는 사무국장(1997. 2~2000. 7)을 맡아 역사 교과서 개정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집요했다. 주 1회 스터디 모임을 하고,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과 고노 담화 작성에 관여한 관료들을 불러 경위를 따졌다(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은 현 고노 타로 외무상의 부친이다).

스터디 결과를 책으로 묶어냈다. 1997년 12월 <歴史教科書への疑問 : 若手国会議員による歴史教科諸問題の総括>(역사 교과서에 대한 의문: 젊은 국회의원에 의한 역사교과서 문제의 총괄)을 펴냈다.

'역사연구 의원모임'은 정치가로서 아베의 출발점이자 소위 '아베 사단'을 형성하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아베와 나카가와 쇼이치는 아소 타로(麻生太郎), (中川昭一)와 함께 자민당에 ‘역사검토위원회’를 설치해 우익적 사관의 정립과 전쟁범죄 역사의 정당화를 위한 거점으로 활용한다. 나아가 그들은 개헌을 통해서 일본이 평화국가로서의 길을 버리고, 전쟁 가능한 군사대국으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 또한 분명히 한다.

아베의 후진 의원들은 한발 더 나아가 2008년 10월에 <南京の実相 : 国際連盟は '南京2万人虐殺' すら認めなかった>(난징의 실상 : 국제 연맹은 '난징 2만명 학살'조차 인정하지 않았다)를 펴냈다.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난징 대학살까지 부인한 것이다.

아베의 역사관을 형성한 또 다른 축은 1997년 5월 대표적인 우파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하면서 결성된 ‘일본회의’라는 조직이다. 일본회의는 약 4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우익지식인, 관료, 기업인 등이 주도하는 일본 사회 전반의 국가주의화,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우익의 총본산이다.


▲ 아베 총리는 2기 내각부터 공식 홈페이지에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내걸었다. [아베 총리 홈페이지]


‘일본회의’는 '아름다운 일본의 재건과 자부심 있는 나라 만들기'를 설립 목표로 내세웠다. 아베 총리는 2기 내각부터 공식 홈페이지에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내걸었다. ‘아름다운 나라’란 천황을 국가원수로 복귀시키고, 전쟁 국가에 개인의 권리를 제약시킨다는 점에서 과거회귀적이고 국가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나라’와 ‘자부심 있는 나라’를 내건 이들에게 종군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학적인 역사관은 제1의 적이다.

일본회의를 파헤친 언론인 출신 다큐 작가 아오키 오사무의 〈일본회의의 정체〉에 따르면, ‘일본회의’는 현재 가장 강력한 로비 단체로, 그들의 목표를 정의하자면 국수주의적이고 역사수정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가장 중시하여 열성을 다해온 주제는 ▲천황, 황실, 천황제의 수호와 그 숭배 ▲현행 헌법과 그로 상징되는 전후체제의 타파 ▲교육기본법 개정을 통한 국가주의 애국적인 교육의 추진 ▲외국인 차별정책을 옹호하는 전통적인 가족관의 고집 ▲영토문제의 적극적 제기와 자학적인 역사관의 부정 등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회의' 산하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의 특별고문이다. 아베는 또한 일본 내 신사를 포괄하는 종교법인 '신사본청'을 모태로 설립된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회장이다. 아베 총리는 '다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다함께)에도 속해 있다.

아베는 또한 '역사교육 의원모임'의 고문이다. 일본 극우세력을 대변하는 <산케이(産經)> 신문은 민주당 정권 시절인 2011년 2월 27일에 "'역사교육 의원연맹'에 거는 기대"라는 글에서 아베가 회고한 역사교육 의원모임 발족 이유를 이렇게 전하면서 "역사교육 의원연맹이 나설 차례다"고 선동했다.

"왜 이 모임을 만들었냐고? 무라야마 정권 성립 이후, 문부성(현 문부과학성)이 일본교직원조합(日教組)쪽으로 기울고, 1996년에 검정에 합격한 중학 역사교과서 전체에 '종군위안부'기술이 실렸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세계화'의 일등공신

종전 후 반세기 동안 음지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양지로 이끌어낸 일등공신 셋을 꼽는다면, 용기 있는 증언을 한 위안부 피해자들과 그 증언을 정리하고 사료를 발굴한 한·일의 시민·연구 단체, 그리고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일본의 극우성향 정치인들이다.


▲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이 인근의 소녀상 옆에 아베정부를 규탄하는 피켓이 놓여 있다.


미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은 아베 1차 내각(2006. 9~2007. 9) 시절인 2007년 7월 31일이다. 아베는 당시 59년만의 교육기본법 개정과 방위청의 방위성 승격, 개헌 절차를 규정한 국민투표법 제정 등을 성사시켰다. 아베가 고문인 '역사교육 의원모임'은 2007년 3월 1일 군의 위안부 개입을 부인하는 고노 담화 수정안을 발표한다. 일본의 과거사 사죄를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비판한 아베의 지침에 따른 '과거사 3대 담화 수정' 공약 이행이었다.

힘의 원리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국제 관계에서도 작동한다. 아베는 그해 3월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 군이나 관헌(官憲)의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없었다"는 공식 견해를 발표해 주변국의 반발을 초래했다. 고노 담화 수정안은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 채택의 모티브가 되었다. 미 하원은 일본군위안부(성노예) 동원을 '20세기 최대의 인신 매매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아베 총리는 직접 미국에 가서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지만,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역사를 부인하려는 일본의 작태에 대해 "구역질 난다"고 비판했다. 아베 2차 내각 출범 후인 2014년 1월 미국 상·하원은 2007년에 채택한 '위안부 결의안'의 준수를 촉구하는 세출법안을 사상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세계화'의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 아베가 2일 각료회의에서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 목록)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최종 의결함으로써 이웃나라에 ‘2차 경제보복’을 가했다. ‘아름다운 나라 일본’은 아베의 국가주의와 반민주적 본성을 은폐하기 위한 음험한 수사(修辭)일 뿐임을 드러낸 셈이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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