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이런 이야기도 책이 될까요?

임종호 기자 / 기사승인 : 2018-11-08 10: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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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방촌' 산책

▲  해방촌 전경 [정병혁 기자]

 

402번 버스가 블루스퀘어를 지나 장충단로에서 유턴을 해서 남산으로 접어든다. 소월로로 가는 노선 버스는 오랜만이다. 보성여자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려 길을 건너고 계단을 몇 개 내려가자 신호등도 없는 작은 오거리가 나왔다. 해방촌 오거리. 초행 길이지만 자연스럽게 멈춰 있는 차 사이를 뚫고 길을 건너 왼쪽 길을 따라 걸었다.  

 

소월로 20길, 약간 오르막 길이다. 미용실, 제과점, 과일가게, 철물점, 옷가게, 식당 등 가게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다. 과일 가게 앞을 지나다 골목 하나를 발견했다. 좁은 골목 끝 주황빛 전등을 올려다보며 안으로 들어가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아, 여기가 신흥시장이구나.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거기가 요즘 핫하다는 신흥시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천장이 막혀 있었지만 가게들의 불빛 때문에 아주 어둡진 않았다. 방금 전에 걸었던 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액세서리 공방 옆에 오락실, 오락실 옆에 식당, 식당 앞에 갤러리, 갤러리 다음엔 카페, 그리고 이탈리안 레스토랑, 몇 걸음 걸으면 제과점, 거기서 뒤돌아보면 옷수선 가게와 정육점. 오래된 가게 사이사이에 신선한 감각의 가게가 뒤섞여 있었다.

1969년에 개장한 신흥시장은 1980년대까지 해방촌의 중심 상권으로써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니트 제조업이 번성했을 때 일명 ‘요꼬’라고 불렸던 편직기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퍼지고, 해방촌에서 만들어진 니트는 남대문 뿐만 아니라 동대문 평화시장에서도 판매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쇠퇴하던 신흥시장은 2010년 이후,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들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스무살 잡지 만들기 프로젝트’, ‘해방촌 아티스트 매거진’, ‘해방촌 아티스트 오픈스튜디오(HAO)’ 같은 프로젝트가 해방촌과 신흥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왔다. 

 

▲ 독립출판물로 가득한 ‘별책부록’ 서점 [정병혁 기자]


신흥시장을 통과해서 해방교회 옆 길을 따라 보성여자고등학교 방향으로 걸었다. 이런 동네에 구두 가게라니. 진열된 구두를 보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성수동 구두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있다가 해방촌에 가게를 열었단다. 책을 만드는 언니랑 가게 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구두 옆에 책이 놓여 있다. ‘모래와 돌멩이’ 라는 글씨가 하나도 없는 그림책이다. 독립출판한 책이라는 설명과 함께 해방촌에 이런 책을 주로 파는 서점이 있다고 했다. 출판사와 상관없이 책을 만든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독립출판 서적을 파는 서점 약도를 그려달라고 했다.

‘고요서사’에는 독립출판물이 한 켠에 있고 주로 문학책이 많았다. 큰 서점에서는 딱 필요한 책만을 찾거나 눈에 띠는 책만 보게 되는데 작은 서점에서는 꽂힌 책들을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지난 여름에 소설 낭독회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여름밤 낭독회 풍경이 사뭇 궁금했다.

‘별책부록’에는 많은 독립출판 책이 깔려 있었다. 책제목이 재미있다. ‘우리가 술에 취해서 했던 이야기들’, ‘그랑 헤어지고 100일의 기록’, ‘도쿄에서 만난 열두 가지 카레의 기억’, ‘백령도에서 12일간의 기록’…. 독립출판 작가는 다양해서 한정지어 말하기 어렵고, 독립출판물 주 독자층은 20대 여성이라고 한다. 몇몇 사람들이 퇴근길에 들러 책을 뒤적거리다 간다.

 

▲ 독립출판 책들 [정병혁 기자]

일주일 뒤, 해방촌 오거리에서 후암동 방향으로 가는 길을 걷다가 ‘초판서점’에 들렀다. 표지는 얇고 내지는 울퉁불퉁하고 안쪽에 풀칠자국이 있는 책 한 권을 집었다. 6000원. 기존의 책값에 익숙한 나는 책의 두께, 책의 크기에 비하면 책값이 좀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독립출판물은 어차피 모두가 한정판이니까 비싼 게 당연했다. 책값을 치르면서 ‘스토리지북앤필름’이라는 또다른 서점을 소개받았다.

용산 2번 마을버스를 타고 ‘스토리지북앤필름’ 앞에서 내렸다. 가내수공업처럼 책을 만드는 작업이 궁금했는데 그런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강좌가 종종 열린다고 했다. 인쇄만하고 나머지 작업은 작가가 모두 손으로 할 수도 있고, 인쇄부터 제본까지 맡기고 서점에 배본만 할 수도 있다고. 독립출판 제작자는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간혹 원고만 써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고 귀뜸해준다.

광복 후 해외에서 귀환한 사람들,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사람들이 남산 자락에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해방촌은 어느 동네보다 이야기가 풍성하다. 그곳에 사소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책으로 묶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책이 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기록하면 책이 될 수 있다. 독립출판물을 파는 서점 약도를 그려준 구둣가게 옆에 있는 카페 ‘비단길’에서 이 글을 쓴다.

강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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