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별기획] 12월의 순수, 제카브리스트

UPI뉴스 / 기사승인 : 2019-02-20 15:24:51
  • -
  • +
  • 인쇄

2017년 9월부터 2018년 9월까지 1년간 나홀로 SUV 차량을 타고 무려 46개국 7만9365km에 이르도록 종횡무진 대륙을 달린 사나이가 있다. 장용우. ‘왕초’ ‘호텔리어’ ‘행복합니다’ 등 수십편의 MBC, SBS 드라마와 JTBC ‘D데이’ 등 대작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가 이번엔 평생 꿈꾸어 오던 드라마형 로드다큐를 만들었다. UPI뉴스 온ㆍ오프라인 채널에 ‘장 감독의 대륙횡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의 현장에다 온몸을 던져 이를 담은 영상과 기사. 그 장대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동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끈다. [편집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광장서 12월봉기 촉발


▲ 박물관으로 소개되는 볼콘스키 공작의 집

 

1825년 12월 14일.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상원 광장에 3000명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유지하고 모였다. 그곳은 18세기의 새벽, 암흑의 러시아를 서구화한 유럽으로 개화시킨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서있는 곳이다. 지금도 서있고 1825년 그날도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 동상은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의 조카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가 세웠다. 장난감 병정놀이나 하던 비실비실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날려버리고 황제에 즉위한 여자다. 네바강을 향해 앞발을 치켜든 말 발굽이 전제군주 차르의 초권력을 웅변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12월은 매우 쌀쌀하다. 병사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틴에게 충성’ ‘콘스티투치야(헌법)’ 두 문장을 번갈아 외쳐대었다. 어떤 병사는 ‘콘스티투치야’가 그들의 상관이 황제로 옹립하려는 콘스탄틴의 부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나서 아들이 없던 황제의 후임으로 두 형제 중 한 명이 왕위를 계승하기로 했다. 둘째인 콘스탄틴은 당시 바르샤바 총독으로서 폴란드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되기를 거부했다. 소문에는 귀국하는 길에 암살 당할 것을 두려워 했다고도 한다.

 

3주간의 혼란스런 논쟁 끝에 작은 동생 니콜라이가 왕관을 쓰기로 결정 되었다. 그 날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반란의 디데이는 그 날로 정해졌다. 반란군들은 계승 서열에서 앞서고 백성들에게 더 인기있는 콘스탄틴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 옹립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고, 진정한 모반의 실체는 법치에 의한 국가수립이라는 혁명이었다.

차르 무자비한 살육으로 하루 1300명 사상


하지만 12월의 봉기는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다. 반란을 지휘하기로 했던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나타나지 않았다. 부사령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리더가 없는 반란군들은 추위에 떨며 “헌법, 헌법, 헌법”만 종일 외쳐야 했다. 페테르부르크 총독 밀로라보비치가 그들의 해산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 왔을 때 과격파 카코프스키가 그를 쏘았고 장군은 즉사했다.

 

니콜라이 1 세는 왕실 호위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황제의 지시에 따라 포병이 대포를 마구 쏘아대면서 반군들은 흩어졌다. 얼어붙은 강 위로 도주하던 병사들은 포탄으로 얼음이 깨지면서 빠져죽기도 했다. 공사 중인 이삭 성당과 해군 참모본부 골목에 매복 중이던 왕실 군대의 잔인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고, 피신처가 없는 병사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진압군의 사냥감이 되었다. 하루 만에 1300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자신의 집에 비밀조직의 문건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친절한 트루베츠코이 공작 덕분에 비밀 경찰들은 손쉽게 체포자 명단을 작성할 수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진 체포와 대대적인 수색으로 잡힌 반군 지도자들은 모두 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 요새의 감옥에 감금되었다. 황제는 죄수들을 직접 심문하였다.


“만약에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다시 충성을 맹세한다면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우리가 옳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우리의 미래가 법에 의해 결정 되는 것이지 전하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차르를 나무랐고 니콜라이 1세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동안 분노와 증오를 삭히지 않고,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 모든 아이디어와 권력을 총동원했다. 전하의 기분에 따라.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어 제카브리스트(декабрист)의 영어식 표현이다. 디셈버리스트 즉 ‘12월(December)의 사람들’ 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12월의 반란을 ‘데카브리스트의 난’ 혹은 격상하여 ‘데카브리스트 혁명’이라고 부르는 내력이다.

 

그들의 주축은 청년장교들이다. 청년의 신체적인 나이는 대개 20대 전후를 말한다. 데카브리스트 대부분이 20대 청년이었다. 24세 이하가 36명, 29세 이하는 50명이다. 러시아 귀족의 자제인 그들은 빠르면 16, 17세 때 군에 입대하였다. 피 끓는 청춘들이었다. 러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조국전쟁’이라 불리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 용맹과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승리의 공신이 되었다.

 

1812년 9월에 모스크바에 입성한 프랑스군은 쿠투조프 장군의 초토화 전술을 견디지 못하고 그해 10월 19일 철수를 시작한다. 러시아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마침내 1814년 몽마르트르에서 항복을 받아낸다.

 

천하의 나폴레옹은 꽃 피는 봄사월 파리를 떠나 엘바섬으로 유배 당하고 러시아는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청년장교들은 패전국 프랑스에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면서 머문 반년 동안 뜻밖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프랑스의 눈부신 문화와 자유주의를 직접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평등한 시민사회의 활력은 러시아의 현실과 비교되었다. 차르의 절대 권력 아래에서 신음하는 농노들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 인구 약 6000만명 중에 5000만명 이상이 농노였다. 국가나 귀족들 소유물인 노예로서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독립이 전혀 없는 농민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하늘이 부여한 당연한 운명인 줄 알았다. 노예도 귀족도 세습이다. 그 누구도 운명의 카테고리 너머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을 쫓아 파리에 들어갈 때 까지는.

 

청년장교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프랑스산 코냑과 향수만 전리품으로 챙긴 것이 아니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이룩한 프랑스의 유산인 자유와 평등의 정신도 함께 가져왔다. 청년장교들은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와 같은 정치제도의 개편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농노의 해방, 농민에 의한 토지 소유 등을 논의했다.

 

청년장교들은 ‘구세동맹(Union of Salvation)’을 조직했고 정치적 견해에 따라 남부, 북부로 나뉘긴 했지만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한 개혁의 필요성은 의심치 않았다. 일부 과격한 청년들은 황제의 암살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였다. 황제 자신도 청년장교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두었다. 그러다가 그의 죽음이 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청년장교 115명 시베리아 강제노동형 받아


▲ 이르쿠츠크의 한국에서 온 시내버스


보복은 가혹했다. 1826년 7월, 황제가 직접 심문하고 판결을 내린 결과 120명의 데카브리스트 중 5명은 사형. 나머지 115명은 죄의 경중에 따라 11등급으로 나누어 형을 선고했다. 사형된 5명은 11등급에 해당 안되는 ‘등외’로 지정되어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이 선고되었는데 차르가 한 단계 감형해주는 관용을 베풀어 교수형으로 처리됐다. 대부분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카토르가) 에 처해졌다.

 

시베리아 유형은 이송 자체가 고문이다. 손과 발에 쇠고랑을 채운 채 마차를 타고 먼 길을 가야 했다. 이송 중에 죽거나 다쳤고, 유형지에선 사고나 정신병 또는 자살로 죽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고 후임 알렉세이 2세가 1856년에 사면령을 내릴 때까지 살아있던 자들은 대부분 유형지 부근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었고 고향에 돌아간 사람 들은 16명에 불과했다. 여기까지는 ‘순수한 청년장교들의 실패한 혁명’이다. 하지만 그들의 진가는 혁명이 실패하고 그들이 끔찍한 시베리아로 내동댕이 쳐지면서 발휘되었다. 

 

절망의 땅에서 학교 열고 질병 치료


그들은 절망적인 유형의 땅에서 낮에는 무릎을 꿇은 채, 하루종일 해머로 광산의 탄을 깨서 운반하고 밤에는 모여 토론과 공부를 이어갔다. 교도소 내에 ‘아카데미’를 열어서 서로에게 전문지식을 가르쳤다.

 

아카데미는 점점 확대되어 다른 죄수와 심지어 지역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다. 자녀들의 교육이 절실했던 부랴트인들을 비롯한 시베리아의 주민들이 아이들을 감옥 학교로 보냈다. 출소한 데카브리스트들은 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학비를 면제하고 교재와 학습도구도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모스크바 농촌경제 연구모임 출신 데카브리스트의 나르쉬킨과 로젠은 당대 농업학의 최신 기술들을 적용한 경작 방법을 개발해 가르쳤다. 자발라쉰은 채소온실 재배법 기술을 전수했다. 가축의 품종개량을 통해 시베리아 농촌에 수익을 가져다 주었고 감자재배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유일한 의사였던 닥터 볼프에게서 기초적인 의학지식와 치료법을 배운 데카브리스트들은 시베리아 각지에서 농부들과 지역민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이들의 헌신과 실질적인 도움이 지역민들의 환영과 존경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민들과 지역관리들은 데카브리스트들에게 눈꼽만큼의 관용도 허용치 말라는 황제의 칙령을 종종 무시하고 그들을 도왔다. 그 바람에 좌천되거나 벌을 받은 관료와 감옥의 간수들도 있었다. 그 전통은 오래 이어져서 나중에 시베리아로 유형간 트로츠키나 스탈린이 탈출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볼 콘스키 부인은 유형지의 관산 찾아가고


▲ 데카브리스트의 아내. 마리아 볼콘스키 공작부인을 모델로 하였다.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그들의 아내이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의 부관을 지낸 육군 소장 볼콘스키 공작은 당대 러시아 상류사회 최고의 미모로 유명했 던 21세의 마리아 니콜라예브나와 결혼했다. 다른 데카브리스트 동지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떠난 남편을 찾아가겠다고 마리아가 황제에게 간청했다. 황제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기어코 가겠다면 귀족으로서 신분과 모든 특권을 포기해야 하고 다시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올 수 없다고 위협했다. 이제 갓 돌을 지난 아기를 시베리아로 데려갈 수도 없으며 만약 시베리아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는 영원히 농노의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녀의 면전에서 직접 이야기했다.

 

차르는 한발 더 나아가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비록 남편들이 살아 있어도 재혼을 허락하는 특별법까지 제정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재혼을 권했다. 하지만 푸쉬킨도 연모했던 이 아름다운 부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그녀는 마차와 썰매를 타고 한겨울의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남편을 찾아갔다. 네르친스크의 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직접 140m 지하 갱도까지 내려간 그녀는 남편을 만나자마자 맨 먼저 그의 발에 채워진 쇠고랑에 입을 맞추었다. 

 

“그 이가 족쇄를 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너무 가슴이 막혀서 저도 모르게 그 앞에 꿇어앉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족쇄에다가 그 다음엔 그 이의 입술에 키스를 했습니다.”

 

트루베츠코이 집은 리노베이션 거쳐 보존


▲트루베츠코이 공작의 집

 

남편의 고난에 대한 위로와 사랑의 표현으로 더 이상이 있을까. 맨 처음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간 아내는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코이 공작부인이었다. 거사 당일 사촌누이집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었고 조직원 명단을 집에 남겨두어 배신자 소리를 들 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존경하였고, 온갖 방해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 최악의 조건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결혼 선물로 부모가 새 궁전을 지어줄 정도의 러시아 최고부잣집 딸이었는데 시베리아에선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친척들이 보내주는 돈을 대부분 데카브리스트 동지들을 돕는 데 써버려서 늘 돈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녀의 집에는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사면되기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두명의 딸을 낳았다. 볼콘스키의 아기는 마리아가 친정에 맡기고 떠난 지 2년 뒤 죽었다. 부부는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1남 1녀를 얻었 지만 돌보지 못한 아기에 대한 아픔을 잊지 못하고 1856년 사면이 되자마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또 다른 데카브리스트의 아내 폴린 아넨코프는 프랑스인이었는데 약혼녀를 따라 시베리아의 치타에 와서 수감 중인 이반과 옥중 결혼식을 했다. 그녀는 활달하고 사교성이 좋아 많은 유형자의 귀족 아내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며 씩씩하게 지내다가 1856년 특사를 받고 남편 과 러시아로 돌아갔다.

 

데카브리스트와 아내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았고 병원과 학교를 지었다. 그들의 손으로 아름다운 집을 지어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예술인들을 초대해서 음악회를 열고 시를 낭송했다. 아내들의 남편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강한 의지는 지역의 관료들과 주민들을 감동시켰다. 그 결과 지옥같은 시베리아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게 된 직접적인 이유이다.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 반면에 증오는 사람을 정신적 고통의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볼콘스키 부부는 1838년 두 아이의 교육비 2000루블을 친정집에서 송금할 수 있도록 황제의 허락을 구했다. 황제는 거절하면서 친절하게도 그 이유를 밝혀준다.

 

“시베리아에는 마땅한 교사가 없다. 따라서 아이들 교육은 부모가 알아서 해야 하므로 추가 지출이 필요없다.”

 

좀팽이 황제는 지나친 반동주의로 유럽국가들로부터 왕따가 되었고 크림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형편없이 당했다. 1855년 차가운 비가 내리는 크림반도의 전쟁터를 시찰하다가 쓰러져 1주일 만에 폐렴으로 쓸쓸이 죽어갔다. 


이르쿠츠크에는 데카브리스트 두 사람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트루베츠코이의 집은 몇번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볼콘스키의 집은 관광가이드 책자에 박물관으로 소개된다. 볼콘스키의 집에서 북동쪽 공원으로 100m 채 안되는 곳에 19세기 여인의 동상이 서있다. 그녀의 발 아래 ‘데카브리스트 아내’라는 명판이 있다.


불의에 항거하여 목숨을 버리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런 용기와 함께 하는 사랑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UPI뉴스 / 글·사진 장용우 감독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뉴스댓글 >

인물

+

만평

+

스포츠

+

'마시알 골' 맨유, 울버햄튼과 1-1 무승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1-1로 비겼다.맨유는 20일 새벽 4시(한국시간) 잉글랜드 울버햄튼 몰리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2020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라운드에서 홈팀 울버햄튼을 상대로 1-1 무승부를 거뒀다.지난 1라운드에서 첼시를 4-0으로 대파한 맨유는 이날 연승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맨유가 공격 주도권을 쥐었고 울버...

램파드의 첼시, 레스터 시티와 1-1 무승부…첫 승 실패

프랭크 램파드 감독의 첼시가 레스터 시티와 1-1로 비겼다.첼시는 19일 새벽 0시 30분(이하 한국시간) 잉글랜드 런던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열린 2019-2020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라운드에서 원정팀 레스터 시티를 상대로 1-1 무승부를 거뒀다.램파드 감독은 지난 12일 열린 EPL 1라운드 원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0-4로 대패해 혹독...

류현진, 50일만에 패전…연속타자 홈런 맞아 4실점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활약하고 있는 LA다저스 투수 류현진(32)이 50일 만에 패배했다.류현진은 18일(한국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선트러스트파크에서 열린 2019 MLB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원정경기에 선발등판해 5⅔이닝 동안 4실점하며 시즌 3패째를 당했다. 2홈런을 포함해 6안타를 내줬으며, 1볼넷, 5삼진을 기록했다.류현진이 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