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회항’의 바람, 태풍 되어 한진가 강타하다

류순열 기자 / 기사승인 : 2019-04-01 20: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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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회장, 주주들에 의해 경영권 상실한 최초의 재벌 총수 되다
조 회장 이사 박탈 견인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가속화 전망
재계, ‘연금사회주의’ 우려속 초긴장… “대한항공만의 일 아니다.”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3월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경영권을 상실했다. 주주들의 신뢰를 잃은 탓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아웃’됐다. 3월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밀어냈다. 역사적 사건이다. 주주들에 의해 경영권을 상실한 최초의 재벌그룹 총수. 조 회장은 대한민국 자본주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렇게 장식할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대한항공 사건을 계기로 주주 행동주의는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국민연금이 맨 앞에 섰다. 국민연금은 한국 자본시장을 좌우하는 ‘연못속 공룡’이다.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이 294개에 달한다. 거의 모든 대기업을 망라한다. 

 

재계는 불만과 우려속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한항공 사례는 주주가치와 기업가치가 극단적으로 훼손될 경우 경영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최초의 선례다. 시장에선 “잘못된 경영을 바로잡은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란 평이 나왔다.

 

‘땅콩’이 던진 부메랑 


시작은 ‘땅콩’이었다. 2014년 12월 5일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사건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탄 조 부사장은 승무원이 견과류를 접시에 담아오지 않았는 이유로 항공보안법을 어기고 비행기를 돌리게 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4년뒤 둘째딸 조현민 씨의 ‘물컵 갑질’, 조 회장의 부인 이명희 씨의 ‘폭언·폭행’ 등 조씨 일가의 갑질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은 사람위에 있었다. 직원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공개된 고함과 욕설은 듣는 이의 가슴을 철렁하게 할 정도다.

 

여기에 명품 밀수, 횡령, 배임 등의 범죄 혐의들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각종 갑질에 ‘부정 대학편입’, ‘공사현장 업무방해’,‘270억원대 횡령·배임’…. 조 회장 일가의 갑질·비리는 그야말로 백화점식이다.  

 

그렇게 조 회장 일가는 사회적 신뢰를 잃었다. ‘땅콩 회항’으로 시작된 바람은 결국 태풍이 되어 조 회장 일가를 강타했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후 이사선임 첫 저지 

 

조 회장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원칙) 도입 이후 대기업 총수가 이사직을 박탈당하는 첫 사례가 됐다. 이사 연임안 표결에서 찬성 64.1%, 반대 35.9%로 연임에 실패했다. 대한항공 정관은 ‘사내이사 선임은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1.56%를 쥔 2대 주주, 국민연금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조 회장과 한진칼 등 특수관계인은 33.35%를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는 외국인 20.50%, 기타 주주 34.59% 등이다. 기타 주주에는 기관과 소액주주 등이 포함돼있다. 

 

이로써 조 회장은 1999년 아버지 고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한항공의 경영권을 잃게 됐다. 조 회장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 회장 장남인 조원태 사장이 여전히 대표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조 회장도 주식 지분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힘 실리는 주주행동주의 

 

주주행동주의란 주주가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활동이다. 의결권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국민이 주인인 국민연금과 소액주주들이 힘을 합쳐 대한항공의 잘못된 경영을 바로잡은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고 이 번 사건을 평가했다.

 

류 대표는 “재벌기업의 총수도 국민과 주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이라며 “이번 사건이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 확산과 적극적 주주권 행사가 왜 중요한지, 코리아디스카운트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명확히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이번 사례는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총수 일가 관련 안건에 반대한 사례 가운데 처음으로 부결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안 본부장은 “한진그룹의 경우 총수 일가의 기업가치 훼손 이력이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다 보니 주주들에게도 그런 부분이 전달된 것 같다”며 “앞으로도 기업가치 훼손에 대한 이력이 있는 총수 일가의 선임 안건에 대해서는 기업들도 긴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스튜어드십코드 센터장은 “이제 좀 더 많은 기관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소액주주들도 전보다 훨씬 관심을 갖고 표 행사에 나서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넓힌다


물꼬가 트였으니 국민연금이 향후 기업의 의사 결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은 자명해보인다. 주주권 행사 범위도 점점 넓어질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배당 뿐 아니라 기업의 부당지원행위, 경영진 일가 사익 편취행위, 횡령, 배임, 과도한 임원 보수 한도 등도 국민연금의 미래 수익에 영향을 주는 중대 사안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자본시장 영향력을 막강하다. 운용액 637조원 가운데 약 17%에 해당하는 109조원가량을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국내 증시 전체 시가총액(1668조원)의 약 6.5%다.  

 

금융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기업은 294개사, 이 중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90개사이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로,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업은 7개사. KT(12.19%), 포스코(10.72%), KT&G(10.0%), 네이버(9.48%)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이다. 하나금융(9.68%), KB금융(9.50%), 신한금융(9.38%) 등 3대 금융그룹도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다. 

 

시가총액 10위권 내 대기업들 역시 국민연금의 주요 투자처다. 삼성전자(10.0%), SK하이닉스(9.1%), 현대자동차(8.27%) 등에서 국민연금은 2대 주주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시총 10위권 내 기업 중 국민연금 보유 지분이 5% 미만인 곳은 삼성바이오로직스(3.09%) 한 곳뿐이다.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경영 활동에 개입할 경우 눈치 안 보고 활동할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긴장하는 재계…“대한항공의 일 만은 아니다”


재계는 불만과 우려를 쏟아내면서도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경영계 단체는 기업활동 위축을 우려했고, 재벌 기업들은 대한항공 사태가 확산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배상근 전무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국민연금이 이번 결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그동안 조 회장이 대한항공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결정으로 판단된다”고 비판했다. 또 “주주들의 이익과 주주가치를 고려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경련은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심도 있는 논의 없이 여론에 휩쓸려 결정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며 “무죄 추정 원칙에 반하며 다분히 주관적이고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대세는 기운 듯하다. 주주행동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렸다. 이미 ‘메기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주주행동주의의 확산에 대응해 일부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모습도 보여주기 시작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기업들은 보다 선진화,투명화한 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주주가치와 기업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순열 기자 ryoos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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