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한때 오렌지족이 놀았던 압구정 로데오 거리

UPI뉴스 / 기사승인 : 2019-05-01 08: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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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새겨진 표지석을 보러 가는 걸로 산책을 시작했다. 전철역에서 나와 압구정로 29길을 따라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비교적 넓게 배치된 건물들 사이에 제법 수령이 돼 보이는 나무들이 버티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게 1976년이니까 나무들은 족히 40년을 훌쩍 넘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셈이다. 


▲ 압구정 로데오 거리 [정병혁 기자]


현대아파트 74동과 72동 사이에서 ‘압구정터’라고 적힌 표지석을 발견했다. ‘조선조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영의정을 지낸 권신 한명회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명소’. 표지석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 옆에 서 있는 안내문은 압구정터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원래 ‘압구(狎鷗)’는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 일을 다 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아주 친근하게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한명회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호를 압구라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한명회가 한가롭게 자연을 즐기며 지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지금의 압구정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겼다. 조선시대에는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말 같은 자연 부락들이 있었다고 한다. 


▲ 압구정터 표지석 [정병혁 기자]


논현로 190길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식당, 정육점, 슈퍼마켓, 카페, 식료품 가게, 옷가게 등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아파트 단지 안의 나무들처럼 가게들도 오래 이 거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압구정로39길을 지나 큰 길을 건넜다. 이제부터가 압구정 로데오 거리이다. 서울의 거리 중 ‘로데오’라는 말이 붙은 게 몇 개 된다. 압구정 로데오, 목동 로데오, 문정동 로데오, 천호 로데오 같은 곳이다. 도대체 ‘로데오’라는 게 뭔지 그 어원을 찾아봤다. 젊은 소비층을 대상으로 한 상권들이 몰려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이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로데오 경기가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를 겨냥해서 상설 할인매장들이 로데오장 근처 거리에 형성된 것이 그 시초라고. 


‘로데오’라는 이미지와 가장 잘 맞았던 곳이 1980년대 중반 고급스럽운 이미지를 내세운 압구정 로데오이다. 패션과 명품의 거리로 자리매김하면서 부유층 자녀들이 수입차와 고급 브랜드 옷을 활보했었다. 이들은 소위 ‘오렌지족’이라고 불렀다. 오렌지족들이 몰려 놀면서 압구정 로데오는 고급 술집들이 성행했다. 


압구정 로데오를 선릉로 157길을 중심으로 골목을 돌아다녔다. 남성의류나 남성 액세서리 가게가 많은 것이 좀 특이했다. 그만큼 패션에 관심 많은 젊은 남성이 압구정 로데오로 많이 온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렌지족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또 다른 오렌지족들을 계속 생기고 있고 그들에게 여전히 ‘압구정 로데오’라는 이미지가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 


압구정 로데오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상가 주인은 물론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힘들다는 기사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실제로 큰 길가에 상가가 빈 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일 오후인 탓도 있지만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드립 커피가 생각났다. 드립 커피라는 걸 처음 마신 것이 압구정 로데오에 있는 카페였다는 게 불현 듯 떠올랐다. 압구정과 나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거리를 걸으니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한 자락이 수면 위로 올라 온 것이다. 어디였지? 드립 커피를 먹었던 카페를 천천히 찾았다. 분명히 큰 길에서 많이 들어간 골목은 아니었는데 비슷한 골목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야 새로 들어섰을 수 있지만 골목이 완전히 달라지진 않았을텐데. 몇 바퀴를 돌아도 정확히 어떤 건물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헤매다가 익숙한 식당을 발견했다. 친구 L과 가끔 갔던 식당이었다. 지나다가 익숙한 상호를 보게 되었고 그 식당을 좋아하던 L이 생각났다. 처음엔 L을 따라서 갔었고, 그 후 다른 사람들과 몇 번 갔던 식당이었다. 나도 모르게 식당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전의 그 주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음식 맛은 그대로였다. 

 

▲  압구정동 아파트 [정병혁 기자]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는 압구정동 연작시가 실려 있다. ‘어느 배나무숲에 관한 기억’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를 보면 압구정동에 막 들어선 카페와 압구정 최후의 원주민이 나온다. 온통 나무로 인테리어를 한 나무랄 데 없는 카페와 안개 속 한남동에서 배추 리어카를 끌고 가던 아버지를 가진 재건대원 복장을 한 압구정 원주민. 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사는 압구정의 모습을 포착하고 그 속에서 끝없이 소외되어 가는 사람들, 압구정의 원주민을 그리고 있다. 개발 이전에는 과수원과 채소밭이었던 곳이 이젠 강남의 노른자위 땅이 되었다.

어둑해지자 압구정 로데오 가게들은 불을 켠다. 카페를 막고 있던 슬라이더 문을 활짝 열고 음악 소리를 높인다.


강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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