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두환의 봉황 병풍과 '광주사태' 유혈 진압한 승자의 이임사

김당 기자 / 기사승인 : 2019-05-21 10: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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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시크릿파일] ⑩조선 19·20대 왕릉 차지한 보안사와 중앙정보부
국보위 개헌팀, 보안사 비밀사무실서 '대통령 임기 6년' 합의
전두환이 "숫자는 럭키세븐(7)이 좋다" 이후 '7년 단임제' 결정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1980년 6월 10일 중정 창설 19주년 기념식에서 "광주사태를 계기로 북한 괴뢰의 계급투쟁 의식에 공공연히 동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경향"이라고 '광주사태'에 대해 처음 언급했다.


▲ 80년 8월 22일 주영복 국방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대장이 전역식을 갖고 있다. 전두환은 대장 예편 닷새만인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가기록원]


그런데 광주민주화운동 10일 동안 광주에선 형사범죄가 오히려 평소보다 줄었다. 80년 5월 20일 당시 광주 시중은행(42개)의 예치금 보유고는 약 1천500억원(한국은행지점 1천300억원, 기타은행 200억원)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과 은행이 예치금 보호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은행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12·12 5·18 실록〉, 재향군인회, 1997년, 319쪽).


또한 그 기간에 북한의 무장간첩 침투도 전무했음이 국정원과거사위의 공식 기록으로 입증되었다. '광주사태의 혼란과 북괴의 무장간첩 침투도발'이라는 비상시국 때문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발족했다는 전두환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언론이 계엄사의 검열과 통제 하에 놓이고, 국민들의 눈과 귀가 가려진 상황에서 신군부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신군부는 국보위가 설치되자마자 본격적인 개헌작업에 착수했다. 이제 전두환의 합법적(?) 집권을 위해서는 '집권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장치로서의 헌법'이 필요할 뿐이었다. 국보위 법사분과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극비리에 5공화국 헌법을 만드는 일이었다.

국보위 법사분과 김영균은 전두환의 육사11기 동기…우병규는 '20년 지기'


12.12 군사반란 이후 육군 9사단장에서 수경사령관으로 이동한 당시 노태우 소장의 고종사촌 처남인 박철언 검사는 국보위 설치 사실이 공표된 다음날인 1980년 6월 1일, 오탁근 법무장관으로부터 6월 5일자로 국보위 법사분과로 파견 근무하라는 명을 받았다. 


국보위 법사분과는 문상익 대검찰청 검찰사무부장이 위원장을 맡았다가 곧 김영균 중앙정보부 관리관으로 교체되었다. 김씨는 육사(11기)를 마치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후 육사 교관, 주월사령부 법무참모, 고등군법회의 심판부장, 육군 법무감을 역임하고 197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김씨는 국보위 법사위원장을 마치고 법제처장을 지냈다


당시 국보위 법사분과 위원은 8명으로 이종남(수원지검 차장검사) 최영광(대검 검찰연구관) 박철언(서울지검 검사)은 검찰, 손진곤(서울고법 판사) 이건웅(서울고법 판사)은 법원, 우병규(국회 사무차장)는 국회, 간사를 맡은 김성훈 육사 교수와 김용균 법무관은 군(軍) 쪽에서 각각 차출되었다(박철언,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1〉, 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35-36쪽).


다른 분과위원들과 달리 특별대우를 받은 법사분과 위원들은 인선 과정부터가 남달랐다. 이들은 국보위 설치령은 물론, 법을 뛰어넘어 극비리에 추진된 개헌이란 막중한 과제를 맡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육사 동기인 김영균 위원장과 우병규를 직접 인선했고,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문상익 검사장을, 문상익은 최영광 검사를, 이학봉 대공처장은 이종남 검사와 손진곤 판사를, 손진곤은 이건웅 판사를,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박철언 검사를, 박철언은 김성훈 교수·김용균 법무관을 각각 추천했다. 


신군부는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와 보안사 내에 개헌작업을 위한 밀실을 마련해 8명의 법사위원들에게 △전문 : 최영광 △권력구조 : 우병규 박철언 손진곤 △기본권 : 이종남 이건웅 △기타 : 김성훈 김용균 등으로 일을 나눠 맡겼다(이도성, 남산의 부장들(139) '최규하 끌어내리기' 극비작전, 동아일보, 1993. 5. 9.).


특히 개헌의 핵심인 권력구조 부분은 전두환의 신임이 각별한 우병규-박철언-손진곤 위원이 보안사 1층에 마련된 별도의 비밀 사무실에서 권정달 정보처장과 함께 만들었다. 5.16 직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문공전문위원이었던 우병규는 당시 최고회의 민정비서관이었던 전두환 대위와 친교를 맺은 20년 지기로, 10.26 사건 직후에도 서로 만나 정국상황과 시국의 향방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그를 초대 정무수석으로 기용했다.

대통령 6년 임기가 대세였으나 전두환 "숫자는 럭키 세븐(7)이 좋다"


대통령 선출방법은 국보위 법사분과위에서 직선제가 대세였으나 신군부와 교감하던 박철언의 개입으로 간선제로 선회했다(이도성, 남산의 부장들(140) 전두환 "대통령임기 7년으로 늘려라", 동아일보, 1993. 5. 16). 또한 당시 유신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헌법 개정에 참여한 법사위원들뿐 아니라 헌법학자들도 6년 임기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1980년 7월 중순께 보안사 밀실 사무실에서 개헌 작업중인 우병규-박철언 법사위원을 불러 프랑스의 예를 들며 "대통령의 임기가 7년은 되어야 한다. 숫자는 럭키 세븐(7)이다. 6보다는 7이 낫지 않느냐"고 말해 대통령 임기는 7년으로 정해져 버렸다(박철언, 앞의책, 36-38쪽).


▲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80년 7월 23일 최규하 대통령보다 먼저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주무장관이 수행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공직사회에선 대통령 하야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국가기록원]


극비작업 끝에 7월 중순께 대통령 선출 방식(간선)과 임기(7년)가 정해지자, 남은 것은 최규하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일뿐이었다. 형식상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인 국보위의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은 7월 23일 이미 국가원수인 최규하 대통령보다 먼저 수해현장을 시찰해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이날 시찰은 최종완 건설부장관을 비롯해 이광로 국보위 내무위원장, 안무혁 국보위 건설위 간사 등이 수행한 가운데 청와대 풀(pool) 취재기자단이 처음으로 근접 취재를 했다. 수해현장 시찰은 박정희 대통령 이래 통치권자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보다 먼저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거기에 주무장관이 수행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공직사회에선 대통령 하야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육사 생도시절에 축구팀 골키퍼였던 전두환은 국제 축구대회에서 승리한 국가대표팀에 국보위 상임위원장 명의로 축전을 보내 대통령의 존재를 사실상 무력화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맡은 국가원수로서의 의전은 고작 부인 홍기 여사가 7월 8일 서울에서 개최한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참석해 세계의 미인들과 기념 기념촬영(7월 8일)을 하거나, 본인이 직접 전두환 중장을 대장으로 승진시켜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8월 5일)이었다.


▲ 최규하 대통령 부인 홍기 여사가 80년 7월 8일 서울에서 개최한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참석해 세계의 미인들과 기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국내에서도 권력 향배에 민감한 기독교계는 전두환 장군이 대장으로 진급한 다음날인 8월 6일 한경직 원로목사 주최로 조향록 목사 등 각 교파 지도자 24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이제 새시대 새사회 건설을 위한 대열에 힘차게 매진하고, 막중한 국운 개척의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자"고 마치 대통령처럼 인사말을 했다. 이제 공직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누가 실권자임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권력 향배에 촉수를 곤두세운 남산(중정) 사람들은 전두환 부장이 곧 군복을 벗고 집권할 것임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양지일지〉에는 전두환 부장이 이미 6월 20일께 중정부장 접견실에서 케냐공화국 국무장관 일행을 접견해 선물을 받는 사진 등이 실려있다. 외국의 국무장관이 정보부장을 만나 선물을 증정한 장면은 그가 대외적으로 실권자임을 보여준 '인증샷'이었다.

80년 7월 전두환 중정부장 이임식…군부 실세와 청와대 출입기자까지 참석


▲ 12.12부터 5.17까지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부장은 1980년 6월 20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접견실에서 케냐공화국 국무장관을 접견해 선물을 받는 등 이미 최고 권력자 행세를 했다. [출처 양지일지]


전두환의 집권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국보위 상임위원장 시절 병풍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鳳凰) 문양을 새긴 사실이다. 10.26 이후 12.12 군사반란을 거쳐 5.17 내란까지 치밀하게 계획한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드러낸 셈이다.


중앙정보부 본청은 1995년 현재의 내곡동 청사로 이전하기 전까지 의릉(懿陵, 조선 제20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능) 경내에 있었다. 흔히 이문동 청사라고 부르지만 실제 주소는 성북구 석관동 산 1-5번지이다. 정보부는 문화재청 소유의 땅을 30년 넘게 무단 점유해 사용하다가 반환했다(현재는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인 장소인 강당만 남아 있다). 


지난호에서 밝혔지만, 전두환 부장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무력진압한 지 2주만인 6월 10일 이곳 왕릉에 조성한 인공연못인 '양지못'에서 중정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부부동반(354명)으로 초청해 축하연을 베풀었다. 이후락 부장은 1971~1972년에 거쳐 무단 점유한 의릉 경내에 '양지못'과 '음지못'을 조성했다. 중앙정보부와 마찬가지로 조선왕릉을 차지했던 보안사도 이에 뒤질 수 없었다.


보안사도 1972년 5월에 서오릉의 명릉(明陵, 조선 제19대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능) 일대 4만1천여평에 보안교육대(보안사 종합교육장)를 만들어 무단 점유해왔다. 이 때문에 서오릉 중에서 명릉만이 보안을 이유로 30년 넘게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2005년에 개방되었다. 군사정권 시절 권력을 지탱하는 양대 축인 보안사와 중앙정보부가 각각 조선 왕조 19·20대 왕의 능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실이 흥미롭다.


왕릉에 자리 잡아서일까? 신군부는 국보위 분과위 구성까지 모두 마친 1980년 6월 중순께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서오릉(명릉) 보안교육대 강당에서 대대적인 파티를 열었다. 국보위위원, 상임위원, 분과위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간부 등이 부부동반으로 수백 명이 모인 파티장에서 참석자들은 깜짝 놀랐다. 전두환 상임위원장 좌석 뒤편의 병풍에는 대통령 휘장으로 사용하는 봉황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이도성, 남산의 부장들(138) 국보위 참여 거부자에 '보복의 칼', 동아일보, 1993. 5. 2.).


1980년 7월 18일 본청 강당에서 열린 전두환 부장서리의 이임식도 대통령을 방불케 했다. 본부 과장급 이상 및 대공분실장 177명은 물론, 외무장관(박동진), 내무장관(김종환), 국방장관(주영복) 등 정부 주요부처 장관들과 계엄사령관(이희성), 육사11기 동기생인 국보위 운영분과위원장(이기백), 역시 육사 동기이자 국보위원인 수경사령관(노태우), 특전사령관(정호용) 등 군부의 실세들이 총출동했다. 


심지어 이 자리에는 청와대 출입기자 29명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아직 최규하 대통령의 임기(1979. 12~1980. 8) 중이었지만, 이미 권력의 추는 한쪽으로 기운 뒤였다. 전두환은 이임사에서 다시 한번 '광주사태' 및 북한 무장간첩 침투 도발과 이에 따른 '국보위'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가 앞서 6월 5일 국보위 분과위원장과 위원들을 모아놓고 훈시한 내용과 대동소이했다.


▲ 기독교계는 전두환 장군이 대장으로 승진한 다음날인 80년 8월 6일 한경직 원로목사(왼쪽에서 세번째)의 주최로 조향록 목사(왼쪽에서 두번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국가기록원]


"오늘날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실로 건국 이래 일찍이 없었던 심각한 도전과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밖으로는 미-소간의 냉전체제가 다시 첨예화되는 가운데 거듭된 석유파동으로 국제경제는 혼미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10.26사태 이후 잇달아 일어난 사북사태, 학생시위, 광주사태, 그리고 김대중 사건 등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내외정세에 편승하여 북괴는 대남 선전공세의 강화와 잇따른 무장간첩의 침투 등 갖가지 도발을 격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국가비상시국에 처해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평상체제로는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하게 되었으며, 안정과 발전에 저해되는 모든 요인을 신속히 제거하여 나라의 안정기반을 다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은 이미 여러분들이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중앙정보부가 국가정보 기능의 중추로서 국가안전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수집, 평가하여 제반 정책수립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그 기본임무라는 것을 상기할 때, 앞으로 여러분의 활동여하(如何)는 곧 국보위가 지향하는 목표 달성 여부를 좌우하게 되며, 그것은 나아가 국가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이임사, 〈陽地日誌〉 104~105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중정 숙정을 신호탄으로 공직·공기업 숙정과 '문제 언론인' 대량 해직


전두환은 이어 "이러한 때에 본인의 대선배이시며 풍부한 식견과 경험을 지니신 유학성 장군께서 새로 중앙정보부를 지휘하시게 되었다"면서 부원들에게 신임 유학성 부장을 잘 보좌할 것을 당부했다. 12.12군사반란 당시 경복궁에 모여 거사에 동참한 이른바 '경복궁 멤버'인 유학성 대장은 예편과 동시에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개편된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고쳐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되었다. 


총칼로 무장한 신군부는 권부(權府)인 중앙정보부를 가장 먼저 장악해 숙정을 솔선수범케 함으로써 국보위의 공직자 숙정과 언론 및 사회 정화를 선도하도록 했다. 국보위는 당시 △안보태세 강화 △경제난국 타개 △정치발전과 내실 도모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 확립이라는 4대 기본목표를 내걸고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국보위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일제조사, 학원소요사태 및 노사분규 배후조종·선동혐의자 일제검거 등의 명목으로 수많은 구정치인·민주인사들을 잡아가두었다. 이어 7월부터는 각 부처별 공직자 숙정작업에 나서 중앙정보부 요원 300여 명을 정리한 것을 신호탄으로, 고위직 공무원 243명을 포함한 5,490명을 정리하고 정부 산하단체 및 국영기업체 임직원 3,111명을 면직시키는 등 광범한 공직자 숙정을 단행해 사회 전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2005. 9. 10, 가람기획).


국보위는 '사회정화계획'의 일환으로 '7·9 숙정조치'를 발표해 공직자 숙정 대상을 4등급으로 분류해 사회정화분과위 전체회의에서 등급을 최종 확정했다. A급 15명은 합수부에서 조사한 후에 처리하고, B급 164명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해 7월 2일쯤 그 명단을 각 부처에 통보했다. 국영기업체 임직원에 대한 숙정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1980년 7월 31일까지 2급 이상 공무원 243명(장관 1명, 차관 6명, 도지사 3명 포함)을 포함한 행정부 5,418명,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금융기관·정부산하단체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공직 또는 관련직에서 사임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직후인 1980년 1월경 이미 군부의 집권방안을 검토한 데 이어, 1980년 3월 경에 집권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언론을 조정 통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Ⅳ(인권침해 사건), 2010. 12, 255쪽). 이후 언론 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은 1980년 6월 허문도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이 전두환에게 보고한 '언론계 정화-정비계획'이 토대가 되었다. 


국보위는 이후 7월말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광표 문공부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하도록 했다.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정화 및 언론인의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한 것도 이 무렵이다. 


결의문이 발표된 지 5일 후인 8월 2일부터 전국의 언론사 별로 대량 해직이 단행되었다. 언론인 해직은 보안사령부의 언론대책반이 작성하여 언론사에 보낸 '문제 언론인' 명단을 토대로 각 언론사가 그해 10월말까지 자체적으로 인원을 추가하여 해직을 단행했다. 1989년 1월에 밝혀진 보안사의 '정화사유별 정화등급별 현황'에는 770명이 해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정화 구실로 '불량배 소탕계획'(삼청계획 5호)과 '삼청교육대'


▲ 신군부는 80년 7월 국보위가 입안한 불량배 소탕작전(삼청교육 5호)에 의거, 계엄사령부의 지휘 아래 군·경이 6만여명을 검거해 그중 약 4만명을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해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를 시행했다. 순화교육중 54명이 사망했는데 12명은 사살, 나머지는 대부분 맞아죽었다. [국가기록원]


국보위는 또한 "국민적 기대와 신뢰를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정화를 위해 '불량배 소탕계획'(삼청계획 5호)을 공표했다. 이 계획은 5·16군사정변 직후의 국토건설단을 참고한 것으로, 1980년 7월 10일경부터 사회정화분과위원장 김만기(중앙정보부 감찰실장)가 주관하고 실무간사 서완수(육사19기) 등이 기안했으며, 7월 28일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받은 뒤에 7월 29일 계엄사에 하달되어,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폭력, 사기, 밀수, 마약사범에 대한 일체 검거였다. 같은 날 계엄사는 계엄포고령 제13호(불량배 일체검거)를 공포해 국보위 발표를 뒷받침했다.


당시 신군부는 "새 시대의 문을 열기 위해 구국의 횃불을 들고 결연히 일어선 우리 군은 이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면서 "새 시대를 위한 과단성 있는 정제작업의 하나로 '불량배 일제소탕'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대수술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삼청교육'이라고 명명한 연유는 단순했다. 불량배들을 군부대(삼청교육대)에서 순화시키는 계획(삼청계획 제5호)을 만든 국보위가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시 군에서 제작한 삼청교육 홍보영상 보면, "전과 초범에서부터 19범까지에 이르는 이들은 수련생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군부대에서 연일 갖가지 순화교육을 받으면서 그동안 이웃과 사회에 지은 부끄러운 죗값을 치러나가고 있다"면서 "군의 이번 조처야 말로 이들에게 있어서 참된 새 출발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라고 미화했다.


하지만 교육 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인 '삼청작전'으로 인해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총 6만755명이 법원의 영장 발부 없이 체포되었다. 피검거자들은 시·군·구 관할 경찰서 단위에서 군·경·검 합심제에 의한 등급 분류심사를 통해 A, B, C, D의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인계, B급은 순화교육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후 사회복귀, D급은 훈방조치 되었는데,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된 3만9,742명이 군부대 내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


A급으로 분류되어 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3,252명이었으며, D급으로 분류되어 훈방 조치된 인원은 1만7,761명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3만9,742명이 순화교육 대상자인 B, C급으로 분류되었다. 순화교육 대상자 가운데는 학생 980명과 여성 319명이 포함되었다. 전체 피검자 중 전과사실이 없는 자가 35.9%에 달해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88년 10월 '여소야대'의 정기국회에서 순화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가혹행위는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국방부에서는 교육 중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12명이 '집단난동'으로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폭행치사나 특수폭행치사로 맞아죽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의 설치가 불법이며, 교육과정에서 각종 인권유린이 있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시 권력에 눈이 멀어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에 가담한 정치군인들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이자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인 유학성도 사법적 단죄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유학성은 1996년 12·12 및 5·18 사건의 피고인으로 기소되어 제1심과 제2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았으나, 대법원 상고심 재판중인 1997년 4월 3일에 사망함으로써 공소기각되어 유죄가 확정되지 않음으로써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국보위가 신군부의 집권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수행한, "안정과 발전에 저해되는 모든 요인을 신속히 제거"하기 위해 실행한 공직자 숙정과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 그리고 삼청교육대 같은 초헌법적 조처들은 나중에 의원면직된 공직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국가배상 판결을 받아 국가 예산으로 보상하게 되었다. 


국보위는 그해 8월 15일 '불량배 소탕을 위한 삼청교육대 수련생들의 순화교육'을 담은 홍보 영상과 함께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사임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대한뉴스는 "최 대통령의 이번 사임은 새 지도세력에게 새 역사를 이끌어갈 책임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논평했지만, 실제로는 강압에 의한 사임이었다.


▲ 1980년 7월 당시 전두환 부장이 중앙정보부장 이임 축하연에서 유학성 후임 부장과 건배를 하고 있다.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경복궁 멤버'인 유학성은 마지막 중정부장이자 초대 안기부장을 지냈다. [출처 양지일지]


앞서 8월 10일 유학성 신임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환 내무부장관에게 "김정열씨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했으므로 곧 하야할 것"이라며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통일주체국민회의 소집을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유학성 등 12.12군사반란 주도세력은 이날 저녁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만찬을 갖고 전두환 대장을 추대할 것을 결의했다. 전두환은 '전두환 장군 대통령추대'라는 현수막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12.12 5.18 실록, 348쪽)


하지만 이는 '각본에 없던 드라마'가 아니었다. 전두환은 이미 8월 5일 '셀프 승진'함으로써 3월에 중장으로 승진한 지 5개월만에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그랬던 것처럼 옷을 갈아입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8월 22일 예편하고 닷새만인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독 출마해 재적 대의원 2,540명 중 2,525명이 투표한 가운데 2,524표(득표율 99.9%)를 얻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전두환은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중앙정보부장(서리) 출신의 첫 대통령이었다. 


▲ 10.26 이후 12.12부터 5.17까지 '다단계 쿠데타'를 거쳐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씨와 이순자씨가 80년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장에 앉아 있다. [국가기록원]


국가안전기획부가 편찬한 〈陽地日誌〉라는 '안기부판 5공전사'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그로부터 한달 뒤에 국무회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중 개정령안(제725호)을 통과시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비상'을 뗀 국가보위대책회의로 명칭을 변경했다. 10.26 이후 12.12를 거쳐 5.17까지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만큼 이제 '비상'은 효용성이 끝난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재임기간의 업무일지인 〈양지일지〉를 단독 입수해 분석한 연재기획을 10회로 마칩니다. 곧 이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업무일지인 〈호랑이일지〉를 토대로 한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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