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제가는 무엇입니까? [창간특별기획]

UPI뉴스 / 기사승인 : 2018-12-05 15: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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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감독의 대륙횡단] Episode #3

2017년 9월부터 2018년 9월까지 1년간 나홀로 SUV 차량을 타고 46개국 79,365km에 이르도록 종횡무진 대륙을 달린 사나이가 있다. 장용우. ‘왕초’ '호텔리어' '행복합니다' 등 수십편의 MBC, SBS 드라마와 JTBC 'D데이' 등 대작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가 이번엔 평생 꿈꾸어 오던 드라마형 로드다큐를 만들었다. UPI뉴스 온·오프라인 채널에 '장감독의 대륙횡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의 현장에다 온몸을 던져 이를 담은 영상과 기사. 그 장대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동은 우리를 또다른 세계로 이끈다. [편집자주]

 

“똥차 환영, 새 차면 부셔가지고 와라”


▲ 프라하에서 울란우데까지 험난한 몽골랠리를 마친 영국대학생 팀. 조지(맨 왼쪽)는 이 팀의 홍일점이다.

 

“용, 당신의 주제가는 뭐야?”


조지가 물었다. 외국친구들에게 나의 풀네임을 가르치는 일이 불편해 그냥 용(Yong)이라고 부르라 했다.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 다니다가 휴학하고 친구들과 몽골랠리에 참가한 조지는 러시아 몽골 국경에서부터 동행한 영국 몽골랠리팀의 홍일점이다. 여자 이름에도 조지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몽골랠리는 유럽에서 몽골을 거쳐 러시아의 울란우데까지 달리는 자동차 모험 경주다. 랠리라곤 하지만 순위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동차 어드벤쳐 투어이다. 2004년에 처음 시작했고 처음에는 런던에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체코의 프라하에 모여서 출발한다. 정해진 루트는 없다. 각자 알아서 길을 찾아 최종목적지까지 정해진 기간 안에 도착하면 된다. 10,000 ~ 16,000 km 정도를 달리고 대부분 3~4주 걸린다. 물론 도중에 포기하는 팀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기도 하고, 남쪽으로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다녀온 친구를 만났다), 이란을 경유하기도 한다. 몽골 횡단은 필수이다. 참가자격이 재미있다. 

 

▲ 1000CC 미만의 소형차들로 몽골의 비포장 초원을 포함 1만6000km를 질주하고 나면 성한데가 별로 없다. 살아남은 차들은 본인이 다시 운전해서 돌아가거나 주최측에서 기차로 라트비아까지 부쳐주기도 한다.

 

첫째, 1,200CC 미만의 자동차(원래는 1,000CC 미만이었는데 이젠 그런 차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좀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또는 125CC 미만의 오토바이(스쿠터 권장) 둘째, 주최측은 랠리 중에 아무런 지원이나 도움을 주지 않는다. 모두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숙식은 물론 자동차 고장, 사고도 참가자가 감당해야 한다. 위험? 위험이 두렵다면 랠리에 도전하지 말고 목욕탕이나 가라. 셋째, 참가비는 1,000파운드(약 145만원) 이상의 기부금. 500파운드는 주최측이 Cool Earth 라는 자연보호단체에 주고 나머지는 참가자가 지정하는 자선단체로 보낸다. 조지네 팀은 영국의 뇌종양 자선단체를 지원했다. 코미디차를 적극 환영한다. 실제로 별의별 웃기는 튜닝들을 다해서 다닌다. 티코급 소형차 지붕에 빨간색 영국 공중전화박스를 얹고 달린 친구도 있다.


주최측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똥차 환영. 새차면 차라리 부셔가지고 와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선 음료회사가 지원하는 청년팀이 참가했었다. 물론 나이나 성별, 국적은 따지지 않는다. 러시아의 울란우데의 골인지점에 포디엄을 설치해 두고 한달 가량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참가자들을 맞이 한다. 이미 2019년 참가자 모집이 시작되었다.

 

테마가 없으면 곁가지라도 붙드는거다

 

잘 못알아 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조지가 다시 물어온다. 

“이번 여행의 주제가, 여행의 테마 뮤직이 뭔지 궁금해” 
“아! 주제가. 내 여행의 테마뮤직 말이지… 음… 어… 그거 좋은 질문인데”

 

▲ 길위의 외로운 자들에게는 의로운 친구가 있다. 광야에서 타이어펑크가 나면 보험사 직원은 없고 어디선가 은인이 나타난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테마뮤직은 매우 중요하다. 대개 드라마의 장르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테마를 설정하고 음악감독이 몇개의 데모를 만들어 와서 감독과 협의한다. 때로는 작가나 배우의 의견을 듣기도 한 다음 그중 하나를 정하는데 요즘엔 제작사(돈 대는 사람)의 의견이 우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메인테마는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경우 모든 길은 ‘사랑’으로 향하기 때문에 테마도 당연히 로맨스(음악 장르로서의 Romance)이다. 업계에서는 발라드라고 부른다. 러브테마는 주인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말고도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많다. 그래서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바쳐지는 테마음악들도 생긴다. 결국 이렇게 가지를 치다보니 영희의 테마, 철수의 테마, 영희 아버지 테마, 철수 옛날 애인 테마…이렇게 복잡해 진다.

 

조지의 질문에 금방 답하지 못했던 것은 나 역시 테마가 좀 많기 때문이었다. 여행 출발전에 음악에 대해 미리 생각을 했었다. 처음에 비틀즈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떠올렸지만 금방 탈락시켰다. 제목만 그럴듯 할 뿐 내용은 오버랜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틀즈의 로드는 여자친구집 문을 향하는 길이다. 노래도 처진다. 비트가 없으면 차를 운전하면서 듣기에 적당치 않다. ‘500 miles’도 같은 이유로 탈락. 2011년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일찌감치 정했었다. 강산에의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스페인의 잔인한 여름 햇살을 뚫고 메세타의 마른 고원을 가로질러 갈 때, 오세브레이로의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음악을 정하지 못한채 출발했다. 같이 일하는 임하영 음악감독이 몇곡을 선물해 주었지만 그건 나중에 동영상을 만들 때 활용할 것이었지 미리 정한 주제에 맞춘 음악은 아니었다. 테마음악 선정이 어려웠던 까닭은 준비기간이 짧고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테마음악이 있으려면 테마가 있어야 한다. 즉, 여행의 당연하고 배타적이며 정체성이 분명한 주제가 있어야 한다. ”왜, 나는 왜 떠나는가?”에 대한 대답 말이다. 여행의 주제가 없으니 주제가를 정하는 일도 어렵다. 억지가 되기 쉽다. 하지만, 어쨋건, 현실적으로. 외로운 여행자가 복잡한 주제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대안을 찾자. 테마가 안 떠오르면 곁가지라도 붙드는거다. 그래서 감상용 여행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필요에 따라 두개의 폴더로 나누었다. 하나는 ‘에너지 energy’ 다른 하나는 ‘외로움 Lonely Only’이라고 이름지었다. 전자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잠 깨우는 목적, 후자는 혼자 궁상 떨며 그리움와 원초적인 비애감에 젖어들 목적이었다. 이런걸 BG(Background Music)라고 부른다. ‘에너지’ 폴더의 대표곡은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이었는데 나중엔 마마무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단연 효녀 노릇을 했다. 어쩌면 저렇게 곡을 잘 만들고 어떻게 저렇게 노랠 잘 하는지 놀랍다. 한가지 더하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뮤직비디오를 못 찍는지도 신기하다. ‘외로움’ 리스트엔 닐 다이아몬드의 ‘Feels like home’을 비롯한 다수의 레퍼토리와(2010년에 발매된 그의 앨범 ‘Dreams’에 있는 곡 대부분. 빠다 냄새 물씬한 청승)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상위에 올랐다.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내가 여전히 청춘의 마지막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오버랜드 테마음악의 제목은 ‘어디 가?’

 

BG는 얼마든지 추가되고 삭제될 수 있지만 테마는 다르다. 미리 정하기 어려우면 다니면서 생각해 보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작정하고 태어난 것 아니니까 내 삶에 무슨 주제 따위가 있겠냐. 그러니까 내 인생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그럴 순 없지 않은가. 미리 정한 목표를 향해 정진해 온 삶이 성취를 이루었다면 더 없이 자랑스러울 터이지만, 우왕좌왕 살았다 할지라도 열심히 살아온 인생의 어느 마루에서, 한번 뒤돌아 보고 삶의 주제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오버랜드 여행의 주제이기도 하다. 뒤도 돌아보고 지평선 너머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테마이다. 음악도 그에 맞추면 될 것이다. 아직 조지에게 답하지 못했지만 음악감독에게 의뢰할 테마음악의 제목은 정해졌다. “어디 가?” 

 

“대륙의 로망을 찾아 시베리아를 넘어라”


▲ 몽골랠리에 참가한 세팀의 영국친구들과 동행이 되었다. 몽골의 작은 마을 을기의 게르.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할 때, 멀리 철조망 뒤편에 남겨진 내 여자를 보면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떠올랐다. 배가 내항을 빠져 나가 동해바다로 나가고 나서 몇차례 들었는데 단순솔직한 트로트의 힘을 느꼈다. 그 힘이란 다시 말해서 약간의 죄책감과 코끝이 찡해 지는 뽕짝정서의 촉매작용이다. 그리하여 나의 첫번째 테마음악은 심수봉의 노래였던 셈이다. 심지어 러브테마 아닌가. 물론 가사내용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쓸쓸한 표정 짓고 돌아서서 웃어버리는” 비열한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심수봉의 레퍼토리는 나중에 하나 더 추가된다.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라트비아 오리지널 히트곡이다. 여배우를 사랑한 화가 이야기가 내용인 러시아 버젼이 더 유명하다. 그들에게 한국판을 들려주면 반가와 하며 놀랜다. 가사 내용을 말해주면 더 놀라고. 심수봉 버전의 우주적인 스케일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 2017년 9월25일 블라디보스톡 입항


지루한 밤 항해를 끝내고 이스턴드림호가 마침내 블라디보스톡 항구로 들어간다. 동쪽으로 루스키 대교를 배경으로 커다란 범선이 정박해 있고, 뱃머리 너머 언덕위에 독수리 전망대와 구시가지 건물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최대도시, 인구 60만, 연해주의 행정중심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 등등의 수식어는 저들의 표현이다. 여행자의 자아로써 바라보는 블라디보스톡은 오버랜드 여행의 그라운드 제로, 시베리아 횡단의 전진기지, 러시아의 시작과 끝이다.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드라마가 달라진다. 관광객들이 로맨틱 코미디를 꿈꾸고 있는 동안 오버랜더들은 미스테리 액션을 찍어야 할 것이다.

 

23시간 항해에 떡이 된 주인공이 배에서 내려 블라디보스톡 역을 빠져 나오자 러시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의 마중을 받는다. 날카롭지만 따뜻하고 엄격한 격려의 눈빛, 온 세상의 노동자와 농민을 다 무등 태울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한 어깨, 결코 구부려지거나 관절염에 걸릴 것 같지 않은 튼튼한 두 다리, 다가오는 시베리아의 겨울눈보라를 견디기에 아무 문제 없는 외투자락을 휘날리며 힘찬 손짓으로 나의 갈 길을 가리킨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또는 가짜 이름 니콜라이 레닌의 소리없는 외침이 들려왔다. 


“달려라 서쪽으로. 혁명의 이상, 대륙의 로망을 찾아 시베리아를 넘어라!”

 

UPI뉴스 / 글·사진 장용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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