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뱃길이 도피였고 안식이었다" [창간특별기획]

UPI뉴스 / 기사승인 : 2018-11-29 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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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감독의 대륙횡단] Episode #2
떠나가는 배

2017년 9월부터 2018년 9월까지 1년간 나홀로 SUV 차량을 타고 46개국 79,365km에 이르도록 종횡무진 대륙을 달린 사나이가 있다. 장용우. '왕초' '호텔리어' '나쁜 친구들' '행복합니다' 등 수십편의 MBC, SBS 드라마와 JTBC 'D데이' 등 대작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가 이번엔 평생 꿈꾸어 오던 드라마형 로드다큐를 만들었다. UPI뉴스 온·오프라인 채널에 '장감독의 대륙횡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의 현장에다 온몸을 던져 이를 담은 영상과 기사. 그 장대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동은 우리를 또다른 세계로 이끈다. [편집자주]

 

오버랜드 여행은 출발부터가 좌절

 

▲ 동해항을 나서면 배는 계속 동진한다. 북한 영해를 지날 수 없기 때문에 많이 둘러가야 하는 것 같다.


'떠나가는 배'에는 몇가지 버전이 있다.


노래로는 제일 먼저 정태춘 박은옥이 검색된다. 박용철 시인의 시 "나 두 야 간다..." 가 두번째다. 그러나 나의 '떠나가는 배'는 변훈 작곡, 양중해 작사의 가곡이다. 한국적 해학이 돋보이는 가곡 '명태'가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임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테너 엄정행, 박인수가 불렀다. 조용필의 청승 넘치는 트로트 버젼도 유투브에 있다. 하지만 나의 떠나가는 배는 추억 속에 따로 자리 잡고 있다. 1975년 여름, 부산에서 충무로 향하는 300톤급 연안여객선에서 K가 불렀을 때가 제일 좋았다. 억수같이 비내리는 밤배 갑판에서 열번도 넘게 불렀다. 비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여객선 엔진소리를 이기느라 피를 토했다. 빗소리 뱃소리와 어울린 노랫소리가 제대로 들렸을리가 없다. 그래도 제일 좋았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의 가출 청소년들은 그저 멀리 달아나고 싶어서 배에 올랐다. 부산에서 통영까지, 그 가마득한 어둠의 뱃길이 도피였고 안식이었다. 기억이 곧바로 역사가 되긴 어렵지만 추억은 신화가 되기 쉽다. 어쩌면 2017년 가을에 떠나는 이 여행도 그리 될지 모른다. 나의 역사, 나의 신화. 떨리는 일이다. 

 

유일한 루트는 블라디보스톡행


대한민국은 현재 삼면이 바다 한면은 철조망으로 둘러 싸인 실질적인 섬나라이다. 육로가 봉쇄되어 있는 셈이다. 오버랜드overland의 사전적 정의는 해상이나 공중이 아닌 육로를 이용하는 여행을 의미한다. 자동차나 오토바이, 자전거, 말, 도보 등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버랜드 여행은 출발부터가 좌절이다.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이다. 통일 또는 자유여행이 가능해지면 “서울-개성-평양-원산-함흥-나진-블라디보스톡-시베리아” 루트를 생각해 볼 수 있다.(냉면루트라고 미리 명명해 둔다) 

 

중국은 문제가 많다. 일단 중국내에서 면허증을 따야 한다. 그럴려면 중국내 주숙등기가 되어 있어야 하고 면허 신청일 이후 90일 이상 유효기간이 남아 있는 비자를 발급받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관광비자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 착각이었지만 흐뭇했지. 어려서 읽었던 도스또옙스끼를 다시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넓디 넓은 러시아를 가로지르게 되면 얼마나 시간이 많을까. 시간은 많았지만 책 읽을 여유는 없었다.

 

▲ 1년 살림이라는 이유로 다섯박스의 라면, 참치캔과 각종 양념도 실었다.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또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반드시 가이드를 고용해야 하며 중국 당국이 지정하는 4성급 호텔에서만 묵어야 한다. 그 비용은 모두 여행자의 부담이다. ‘이래도 자동차 가지고 올거야?’라는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쉽지만 실크로드를 포기한 이유이다. 현실적으로 유일한 루트는 동해항에서 출발하는 배에 자동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톡을 가는 것이다. 즉, 블라디보스톡이 대륙횡단의 기점이 된다. 비행기표처럼 최저가 티켓 구하느라 애쓸 필요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DBS크루즈 라는 선사에서 운용하는 배가 차를 가지고 블라디보스톡을 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꿈에 부푼 오버랜더들에게 어울리는 이름, 이스턴드림 호는 블라디보스톡-동해-사카이미나토, 삼각항로를 운항하는 단 한척의 선박이다. 최근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북방크루즈 관광객 덕분에 부산, 속초, 포항에서 출발하는 또 다른 항로가 생겨날 전망이고 블라디보스톡에선 화물부두를 여객부두로 전환하는 공사가 한창이라고 한다. 시즌(여름)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이스턴드림호는 단 한척의 선박


▲ 1만3000톤, 길이 140m, 선원 포함 정원 530명. 이스턴드림호


항공여행과 마찬가지로 배타고 해외 가는 것도 기본적인 절차는 출입국(법무부)과 통관(관세청)으로 나누어 진다. 다만, 트렁크와 캐리어만 가져가는게 아니라 자동차(또는 오토바이)라는 화물이 추가됨으로써 일이 좀 많아진다. 겁먹을건 없다. 크루즈회사에서 대부분 처리해 준다. 여객과 화물이 따로 운영되는데 자동차 여행자의 경우 화물예약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러면 직원이 객실예약까지 잡아준다. 온라인 예약은 불가. 전화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신청하면 된다. 선박회사 직원들은 겁나게 친절하다. 여행자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메일을 보내면 상세한 안내와 더불어 미리 제출해야 할 서류목록을 보내준다. 대부분의 내용은 DBS 홈페이지에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대관령이 가까와지자 안개가 밀려 왔다. 

 

▲ 보딩패스를 들고 출국장을 들어간다.


새벽에 집을 출발했는데도 고속도로엔 차들이 꽤 많다. 단풍철이 막 시작되는 9월의 마지막주 일요일. 동해국제여객선 터미널 입구에 있는 주유소에서 주유하고 터미널로 들어섰다(실수였다. 세계에서 기름값이 제일 싼 나라 가는데 왜!) 여객터미널 옆에 선사가 사용하는 건물이 따로 있다. 직원들의 안내로 차량선적료 686,100원(600달러)을 결재하고 수출입확인증을 받는다. SUV가 600달러, 승용차는 500달러인데 500CC 이상 오토바이도 500달러이다. 뭔가 공평하지 않는 것 같다. 승객의 운임은 별도인데 차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할인해 준다.(155,400원, 항만세 2,500원 추가) 여직원에게 부탁해서 확인증 사본을 받아둔다. 보험회사에 보내 책임보험 일시정지의 증빙으로 쓸 것이다. 차량선적에 관한 위임장과 확인서에 서명한다. “배에 싣고 가다가 문제 생겨도 우리회사는 책임 못집니다” 뭐 그런 얘기일 것이다. 그 다음은 차량의 짐검사(짐 다 내려서 일일이 X레이 검사한다)하고 드디어 배의 화물칸에 차를 싣는다.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화물칸에 들어가면 화물담당 승무원들이 위치를 정해주고 차를 고박한다. 출발 1시간전 터미널에 가서 승선권(비행기와 똑같은 보딩패스)을 발급 받고 줄을 선다. 

 

친구들은 2개월이면 항복할 것이라 내기

 

▲ 두사람의 허니문을 축하해 주었다. 소박한 반지, 도스또옙스끼의 첫 장편 '가난한 연인들'의 주인공들 되시겠다.

아직 뱃고동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셀린디옹과 안드레아 보셀리의 중창, “Time to say goodbye”를 틀어주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좀 멋있게 ‘굿바이’ 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등짝을 후려친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멀쩡한 집 두고, 오라는 사람 기다리는 분 하나 없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겠다고 나선 정처없는 이 발길. 잘 있어요, 잘 가세요. 그렇게 훌쩍 떠나고 쉽게 보내기에 1년은 좀 길지 않은가. 수학여행 가는 중2처럼 신이 나서 안절부절하는 철없는 남편이 뭐 그리 이쁘겠는가. 왜 나는 떠나가는 내 앞날의 위기와 모험에만 골몰하고 남은 사람 생각은 못했을까. 불타오르는 가출 욕망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집순이의 독수공방은 단한번도 염려하지 않았을까. 등짝이 화끈거려도 흘겨보는 아내의 눈매가 독수리 같아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친구들은 내기를 했다. 2개월이면 항복할 것이고 길어야 3개월 아니겠느냐. 소문 없이 귀국해서 어딘가에 몰래 잠적해 있을 거다. 다 용서해줄테니 살아서만 돌아와라. 맛있는 와인 사주께. 응원보다는 걱정이 빗발치는 이별의 동해정거장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항을 빠져 나가기 위해 파일럿 보트가 배를 민다. 180도 회전하는 배의 갑판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철망 울타리 뒤에 아내가 서 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뽕짝은 진리만을 노래한다. 남들은 4년이나 준비하기도 한다는데 여행용 자동차 구입한게 지난 8월 28일, 그후 한달도 안돼서 배를 탔으니 뭘 제대로 준비 했겠는가. 맙소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어떡하지 이제, 후회? 잘못된 선택?


하지만 이미 늦었다. 뱃고동이 울고 갈매기도 운다. 가슴 깊이 무겁고 무서운 이펙트 음이 쿵, 쿵 울려왔다. 갑자기 솟아나는 강렬한 질문 하나가 메아리되어 귀에 울렸다.


“나는 왜 떠나는가?”

 

UPI뉴스 / 글·사진 = 장용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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