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경제보복, 손 놓고 당한 건 아니라고?

류순열 기자 / 기사승인 : 2019-07-05 11: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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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경제보복 징후
“충분히 예상했다”면서 대책은 중장기적 대응
일부 준비한 대책이 얼마나 시간 벌어줄 지가 관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시작된 7월4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아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말했다. “손 놓고 당한 것은 아니”라고.  “미리 막아야 했던 것 아니냐”는 여론에 대한 항변(4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이었다. “올해 초부터 경제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었고 해당 내용을 꾸준히 점검해 왔다”는 것이다. 전날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도 “충분히 예상했던 것들인 만큼 잘 대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뉴시스]


과연 그랬을까. 지난 3일 당·정·청 논의나 정부 대응을 보면 그 항변의 진실성이 적잖이 미심쩍다.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뾰족한 대책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일 발표된 대책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와 ‘반도체 중간재 등 핵심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내년부터 매년 1조원씩 투자한다’는 내용이 거의 다였다. 대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멀고 먼 얘기’들이었다. 발등에 불이 붙었는데, 이제 소화기를 만들겠다고 발표하는 꼴이었다.


구체적이지도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이달중 발표할 계획이다. 성윤모 장관은 “기간산업에 필수적인 소재부품, 수입선 다변화, 국내생산 경쟁력 제고 등 다방면에 걸쳐 정부가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많이 들어본 얘기다. “수입선 다변화”, “국산화율 제고”는 오랜 세월 정부와 산업계에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던 얘기다. 숱한 세월을 그렇게 구호만 외치듯 보냈는데, 다시 어느 세월에 이 숙원을 이룰 것인가. 모두 “손 놓고 당한 것은 아니”라는 경제부총리의 발언을 무색케 하는 대책들이다.


▲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반발로 일본이 경제 보복을 시작했다. 한국 정부도 강경 대응 태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작년 10월)이후 경제보복의 징후들이 이어졌다. [UPI뉴스 자료사진] 


경제보복 징후에도 “설마” 했나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4일부터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의 대 한국 수출과 제조 기술 이전에 대해 포괄적 수출 허가제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허가 신청 면제 등의 우대 조치를 없애고, 수출 때 건건이 심사하겠다는 것이다.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는 주로 반도체 제조에, 불화폴리이미드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액정표시장치(LCD) 등 디스플레이 생산에 쓰인다. 한국경제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핵심소재 수출을 통제하는 것으로 경제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5월 기준으로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 전체 수입 중 일본 비중(대일 의존도)은 각각 91.9%, 43.9%였다. 플루오린폴리이미드의 대일 의존도도 93.7%에 달한다.

경제보복 징후는 진작 나타났다. 작년 10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였다. 판결 한달 뒤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고위관계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두 부처를 거친 전직 고위관료. 그는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경제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 전직 고위관료는 지난 2일 한 언론과의 통화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의 보복 징후를 포착했고 이를 알려줬다”고 말했다.


지난 3월엔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의회에 출석해 “일본 기업 피해가 현실화하면 한국에 대해 송금 중단, 비자 발급 중지 등 여러 보복 조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여러 차례 경제보복 가능성을 내비쳤던 것이다.


홍 부총리의 말대로 정부는 경제보복 가능성은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했는지는 의문이다.


지한파 경제학자인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지난 2일 국내 한 중앙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을 전후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여러 방식으로 경고했지만 한국 정부는 피드백(반응)이 없었다”며 “일본 정부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거나 사태가 심각해지면 대응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야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넋 놓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정부와 업계가 넋 놓고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름 일본 정부의 핵심 소재 수출 규제 가능성을 예상해 대비책을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소재는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도 확보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업계 관계자 A씨는 “일본 정부가 한국과의 외교 관계 악화로 지난해부터 불화수소 공급 중단 가능성을 언급해 국내 대기업이 다른 수급 경로를 확보한 것으로 안다”면서 “일본에서의 수출 중단을 고려, 대만에서 불화수소를 공급 받기로 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쓰이는 핵심 소재다. 금이나 백금을 제외한 금속 대부분을 녹일 정도로 부식성이 강해 실리콘 웨이퍼 불순물 제거에 활용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지난해부터 준비를 해 왔다.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일부 품목은 국산화를 위해 공장까지 짓고 있다”고 말했다.


▲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에서 열린 제1차 외교전략조정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WTO 제소도 시간은 걸리겠으나 한국이 유리할 것이란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특정국, 즉 우리나라만을 겨냥하고 있어 일본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불화수소와 함께 반도체 제조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다.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신에쓰, JSR, 스미토모화학 등이 공급하고 있는데 당장은 국산화 또는 대체가 어려운 상황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게다가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줄줄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단계적 보복카드가 준비돼 있다는 말이다.


▲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관계자들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 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결국 정부와 업계의 ‘아쉬운 대책’이 얼마나 시간을 벌어줄 것인지가 관건이다. 일본 경제 보복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WTO 제소 등 일본과의 협상에서 정부와 산업계가 버틸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을 벌어준다면 “손 놓고 당한 건 아니”라는 홍 부총리의 항변도 비로소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UPI뉴스 / 류순열 기자 ryoos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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