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당의 시크릿파일] ⑥중정 6국(수사국), 김대중 덕분에 죽다 살아나다

김당 기자 / 기사승인 : 2019-04-23 1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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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일지〉속의 전두환 부장 '지시각서' 1, 2호에 담긴 전두환의 의중
권력기관(중정) 먼저 쳐서(자체 숙정 232명) 일반 공직자 숙정(3727명) 선도

대학 캠퍼스의 개학과 함께 찾아온 1980년 '서울의 봄'은 12·12사태 이후 권력의 향배를 점치기 힘든 '안개정국'이었다.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가 6년 만에 부활해 심재철(사범대 영어과 4년, 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회장에 당선되었다. 


▲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임한 전두환 중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주영복 국방장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최규하 대통령을 예방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국가기록원]


4월 15일 서울대생 2천여명이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에 대한 항의 집회를 연날, 전두환 중장은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했다. 며칠 뒤에 강원도 사북탄광에서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광부들의 유혈 폭동이 발생했다. 이어 4월 26일에는 신현확 총리가 "사회질서 안정이 계엄해제의 요건이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 겸직은 결코 탈법이 아니다"라고 언명했다.


그런 가운데 4월 29일 전두환 중정부장서리는 기자간담회를 갖고 사회 일각의 김재규 구명운동에 유감을 표명했다. 또한 자신의 중정부장과 보안사령관 겸직이 정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며 중정 조직 축소·개편내용을 발표했다. 이날 계엄사 전군 지휘관회의에서는 과격한 학원 소요와 노사분쟁에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전두환 부장서리, 남산 동보성에서 딱 한번 기자간담회


전두환은 부장서리로 3개월여 재임 중에 기자간담회를 4월 29일에 딱 한번 했다(언론을 불편해한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뒤에 신년 기자회견을 철폐하고 국회 국정연설로 대신했다). 이날 저녁 7시 남산의 중국음식점 동보성(東寶城)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진행된 간담회에는 청와대 출입 종합일간지와 방송기자 15명이 참석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는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정권과 소속사의 중간 창구'로서 대외적으로 '1호 기자'의 상징적 위치를 점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정보기관에는 상시 출입기자가 없고,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명분으로 1년에 한두 번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초청해 안보정세 설명회를 하는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신군부의 강압적인 언론 통폐합이 시행되기 전이었다.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초에 이미 보안사 2처(정보처 권정달 대령)에 언론반(이상재 준위)를 신설하고 그해 11월 권력 장악에 필수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저항적이거나 비판적인 언론인을 해직했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신문사 11개(중앙지 1, 경제지 2, 지방지 8), 방송사 27개(중앙 3, 지방 3, MBC 계열 21), 통신사 6개 등 44개 언론매체를 통폐합시키고, 각종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시켰다. 또한 1,000여명의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켰다. 이때 중앙지(종합일간지) 중에서 유일하게 통폐합된 매체가 〈신아일보〉인데, 신아일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길홍 기자이다. 


언론 통폐합을 추진한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과 동향(경북 안동)인 김길홍은 신아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김씨는 권정달로부터 신아일보 폐간 정보를 듣고, 1980년 7월22일 경향신문 정치부장대우로 발 빠르게 옮겼다. 이후 그는 경향신문에서 '전두환 찬양열전'을 주도해 일약 신군부 언론실세로 부각, 1982년부터 청와대 비서관으로 갈아탔다. 그는 1988년 총선 땐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전두환 신화의 주인공들, 미디어오늘, 2018. 9. 1)


▲ 전두환 대장의 전역사(轉役辭) 전문을 실은 1980년 8월22일 경향신문 1면. '참신한 改革意志(개혁의지)로 새 歷史創造(역사창조)'라고 써 있다. [경향신문]


전두환의 첫 중정 개편안은 6국(수사국) 폐지하기로


전두환 부장이 기자간담회를 한 날은 중앙정보부 과장급 이상 간부 전원에게서 받은 사표 가운데서 부서장급 이상 40명 중 33명의 사표를 수리(면직 처리)한 날이었다. 전 장군 휘하의 보안사 '점령팀'이 선별작업을 했다. 


전두환은 기자 간담회에서 이란의 사바크와 이스라엘의 모사드를 예로 들며 기구를 축소 개편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개편 원칙은 △유사 기능의 통폐합 △능력본위 인사 발탁 △철저한 비노출 활동을 통한 국내외 대공정보 및 정책자료 수집 등 세 가지였다. 전두환 부장의 정보부 숙정작업은 이른바 개혁주도세력의 의지를 솔선수범해 보이기 위해 자신부터 고통을 감내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신군부는 그렇게 해서 권력기관 중앙정보부의 '자체 숙정'으로 232명을 먼저 친(80. 7. 5) 다음에, 국보위 정화분과위원회를 통해 고위공직자(2급 공무원~장관) 232명을 숙정(80. 7. 9)하고, 마지막으로 3급 이하 공직자 3,495명을 면직(80. 7. 15)시켰다.


원래 보안사 권정달 정보처장·허화평 비서실장·허삼수 인사처장이 만든 개편안은 부장 밑에 단일 차장을 두고 10개 부서로 축소하고 과장급 이상 전(全)직원들로부터 사표를 받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4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조직축소 개편방침을 발표하고, 4월 30일 중앙정보부 제도개선위원회가 구성되어 1주일 뒤에 개편안이 전두환 부장에게 보고되었다. 


1안은 해외정보 분야만 남기고 모두 없애는 방안, 2안은 국내정보 중 수집기능만 유지하고 수사 기능을 폐지하는 방안, 3안은 인원만 축소하고 10·26 사태 이전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안이었다. 전 부장은 "규모는 2안으로 하되, 정신과 취지는 1안으로 하는 절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민주인사들은 물론, 심지어 집권당 중진의원들까지도 잡아다가 주리를 틀어온 남산의 중정 6국과 지하실이 도상(圖上)에서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남산에서 정치사찰을 담당한 '6국'과 고문(拷問) 수사의 상징인 지하실이 생겨난 것은 이후락 부장 시절이다. 이후락은 대공수사와 정치사찰 업무가 뒤섞였던 것을 정리해 정치사찰을 전담하는 6국을 만들어 정치판을 주물렀다. 김동근(金東根)·김성주(金聖柱)·이용택(李龍澤)·모성진(牟聖鎭) 국장이 6국의 역대 책임자였다(이도성, 남산의 부장들(133) 5월17일…신군부 '마각(馬脚)' 드러내다, 동아일보, 1993. 3. 27).

전두환 부장의 '지시각서 1호''지시각서 2호'에 담긴 내용


〈陽地日誌〉에는 전두환 부장의 '지시각서 1호'와 '지시각서 2호'가 실려 있다. 지시각서 제80-1호는 '업무쇄신 지시'이고 제80-2호는 '조직개편 및 인사조치에 따른 지시'이다. 두 지시각서에는 당시 전두환의 중앙정보부 업무쇄신에 대한 의중과 조직 개편안의 골자가 담겨 있다.

전두환은 전 부서장에게 보낸 지시각서 1호(80. 5. 1)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부를 떠난 부서장들이 부(部) 재직중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10·26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부를 아끼고 후진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한 충정에서 자진 퇴임하게 된 것을 본인은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중략)…앞으로의 인사관리는 부외에서 기용하지 아니하고 부내에서 부의 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유능한 인재를 발탁 보직할 계획이며 부원 여러분의 신분도 최대한 보장할 방침임을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입니다."(국가안전기획부, 양지일지, 1985년, 39~40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전두환은 이외에도 지시각서 1호에서 업무쇄신을 위한 중앙정보부상(像) 정립을 강조하면서 △능률적·효과적인 기구 개편안 연구 및 건의 △자질 향상과 전문화를 위한 정예화 방안 수립 및 시행 △좀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업무처리 능력 배양 △월권행위 등 특권의식의 풍조가 싹트지 않도록 자숙할 것 △정보의 사명은 보안이므로 자기생명과 같이 보안을 지킬 것을 지시했다(양지일지, 39~41쪽).


▲ 중앙정보부의 대북 통신 감청기지인 '202기지'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부장(가운데)이 간부들과 함께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있다. [양지일지]


하지만 전두환은 5월 6일 남산 분청사 회의실에서 열린 재경부서장 회의에선 "이 사람(본인)도 여당도 알고 야당도 알고 여러 모로 아는 사람이 더러 있다"면서 "누가 정권을 잡든 간에 옛날의 정보부원은 전부 다 해임시켜야 하며 전부 잡아넣어서 과거에 한 것을 캐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겁박했다.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기구 개편을 하기 전까지 서울분실을 운영했는데, 이날 회의에 참석한 재경 부서장은 18명이었다. 


그는 이어 "운전수까지 전부 잡아넣어 봐야 5천명밖에 안된다"고 허세를 부렸다. "그렇게 하면 중요한 간부들은 일단 들어가서 과거에 했던 공작이고 뭐고 간에 전부를 다 조사받는 아주 불행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면서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10·26사태 이후 오늘날까지 중앙정보부를 보호해온 사람이 바로 본인입니다. 본인이 만약 그때에 외부의 모든 사람의 감정과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대부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와대) 경호실에는 과장급 이상 전부 사표 내고 다 나갔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도 이 기회에 과장급 이상 대부분은 막 잘라버려라 하는 것을 나한테 정책적으로 조언하는 사람,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명령계통에서도 그렇게 군부에 지시를 했지만 나는 중앙정보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습니다."(양지일지, 84~85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전두환 부장, '기관원 언론사 출입 금지' 지시하기도


한마디로 말해 주변에선 중정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다 잘라 버리라고 하는데도 본인이 버티고 보호해주고 있으니 충성하라는 메시지였다. 전두환은 윤일균·전재덕 두 차장과 관련 "어느 차장은 (합수부에) 잡아다 조사를 하고 어느 차장은 조사를 안할 수도 없고, 차장 둘을 한꺼번에 잡아다가 조사를 하면 정보부를 누가 지휘하냐"고 부서장들에게 반문했다. 


그는 이어 "사실은 두 사람을 연행해서 우리 옆방까지 데려다 놓았다가 내가 그때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도로 복귀시킨 것"이라며 "딴 뜻이 없고 중앙정보부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앙정보부를 수술하기 위해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남산의 첫번째 숙정(肅正)에서 살아남은 부서장 7명은 물론, 새로 발탁된 부서장들도 죄다 얼어붙거나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전두환 부장은 '철저한 비노출 활동을 통한 국내외 대공정보 및 정책자료 수집'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두환 부장이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기관 출입을 금지하고 비노출 정보활동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때까지 출입을 당연하게 여겼던 언론사에 대해서도 출입을 하지 말라고 강조한 점이다. 


"신문사에 우리 요원들이 출입하는데 신문사에 가 가지고 이거 신문에 내지마, 이거 신문에 내, 그럴 힘이 있어요? (언론이나 기자들이) 말 들어요? 안 듣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딱 출입을 안해 버리는 것이 깨끗하다 이겁니다. 영향력이 없으면서 공연히 출입할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출입해 봐야 덕도 없는데 출입 안하는 것이 외부에서 볼 때는 '아 정보부가 출입 안 하는구나' 이렇게 된다 이겁니다."(양지일지, 87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그러나 1주일만에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대학가의 데모가 대규모 시위로 확산된 5월 13일 전두환 부장은 편제 개편을 전면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기구 개편 논의에서 가장 먼저 폐지로 가닥이 잡혔던 6국, 즉 보안수사국은 이렇게 죽다가 살아나, 5월 17일 심야에 당시 권총으로 무장한 안전국 요원들과 함께 김대중과 재야인사들을 체포·구금하는 5·17쿠데타(비상계엄 확대 및 예비검속)의 일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중정부장서리라는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합법적으로 대통령 권좌에 오르려는 전두환의 앞길에 큰 걸림돌인 김대중 진영에 대한 수사, 실제로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한 수사가 장기화함에 따라 수사국은 일단 진행중인 사건 수사가 끝날 때까지 잠정 편성해 놓기로 결말이 났다. 실제로 전두환 부장은 한 달 뒤인 6월 1일 중정의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을 동시에 단행한 가운데 수사국을 존치시켰다.


전두환 부장이 중정 개편안에서 폐지키로 했던 수사국은 결과적으로 김대중 덕분(?)에 살아남아 현재까지도 정보수사권이라는 양날의 칼을 가진 '위험한 정보기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계속해서 ⑦[단독] 전두환, 광주5.18 무력진압후 주한미군사령관 비밀 접견 편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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