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별기획] '시베리아 SUV 수용소'의 하루

UPI뉴스 / 기사승인 : 2018-12-25 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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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감독의 대륙횡단] Episode #6
라면 150개를 싣고 떠난 1년의 여행

2017년 9월부터 2018년 9월까지 1년간 나홀로 SUV 차량을 타고 무려 46개국 7만9365km에 이르도록 종횡무진 대륙을 달린 사나이가 있다. 

 

장용우. ‘왕초’ ‘호텔리어’ ‘행복합니다’ 등 수십편의 MBC, SBS 드라마와 JTBC ‘D데이’ 등 대작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가 이번엔 평생 꿈꾸어 오던 드라마형 로드다큐를 만들었다. 〈UPI뉴스〉 온ㆍ오프라인 채널에 ‘장 감독의 대륙횡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유럽과 아시아 대륙 곳곳의 현장에다 온몸을 던져 이를 담은 영상과 기사. 그 장대함과 정교함 그리고 감동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끈다. [편집자]

 

황량한 벌판도 라면 끓여먹기엔 명소다


▲ 시베리아 하이웨이의 한적한 휴게소. 아무것도 없다고? 진정한 휴식이 보이지 않는가.

 

하바롭스크를 217km 남겨 두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캠핑 의자를 꺼내 조립한 다음 느긋하게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평상시에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멀리 하던 메뉴이지만 여행을 나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군대에서 불침번 서다 먹는 라면. 고도 8km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먹는 라면을 최고로 꼽기도 하지만 시베리아의 황량한 벌판도 라면의 명소에 추가될 예정이었다. 오늘 여정의 첫 번째 식사이니 더 황홀할 것이다.

달네레첸스크를 지나 계속 달리는 동안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하였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찾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구입한 부탄가스는 트렁크 맨 뒤 쪽 수납 상자에 있어서 금방 꺼냈다. 아이스박스를 꺼내 그 위에다가 가스레인지를 놓고 물을 끓였다. 냄비를 찾느라 다시 짐을 뒤졌는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출발 때부터 짐들을 대충 실은 데다 동해항에서 세관검사 하느라 모조리 꺼냈던 짐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탓에 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바롭스크 시내에 들어서니 차가 막혔다

 

▲ 사과를 깍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변신하기도 했던 나의 어여쁜 빨간 칼


우아한 정찬, 냄비라면은 포기하고 컵라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비행기 탑승객의 입장에서 보면 비즈니스에서 이코노미로 강등된 것이다. 다행히 주전자를 조수석에 꺼내 두어서 물은 끓일 수 있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취사의 모든 것을 꼼꼼히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수저를 집에 두고 온 모양이다. 어쩌면 짐 속 어딘가에 깊숙이 처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국회청문회 답변처럼 영혼 없는 변명이 아니라 정말 절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의 상태이다. 컵라면 사면서 받았던 나무젓가락조차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과도로 라면을 먹게 되었다. 그나마 있으니 다행이었다. 맨손으로 컵라면을 먹을 재주는 없다.

아침부터 종일 굶고 오후 늦게 처음 먹은 식사가 컵라면이지만 커피는 제대로 마시고 싶었다. 근데 이번엔 텀블러가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커피 봉지도 하필이면 플라스틱 박스의 하단에 깔려 있었다. 반투명 플라스틱 수납함에 빤히 보이지만 그걸 꺼내려면 위에 있는 짐부터 다 내려야 한다. 가뜩이나 못 먹어서 기운도 없는데 아예 맥이 풀렸다. 

 

도대체 어떤 짐을 어디다 두었는지, 여섯 개의 플라스틱 통에 담은 식량과 용품들은 어떻게 분류해서 어디에 넣었는지 모두가 엉망이고 진창이었다. 쌀, 라면, 통조림, 양념, 비상식량, 견과류, 취사도구, 옷가지, 책, 카메라와 촬영 장비들, 자동차 용품, 비상약, 캠핑용품 그리고 클래식 기타까지 그 모든 것들을 거대한 통돌이 세탁기에서 두어 시간 돌린 것처럼 섞여 있었다. 대학 하숙생 시절 전 재산의 두 배가 넘는 일 년치 살림을 차에 싣고 왔음에도 정작 라면 한 그릇, 커피 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게 된 거다.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벌어진 사고이다.

하바롭스크 시내에 들어서니 차가 막혔다. 퇴근 시간에 맞춰 도시로 들어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새벽에 출발해서 일몰까지 달려 도착하면 저절로 퇴근시간이 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새처럼 자유로운 여행자가 여전히 출퇴근 교통지옥의 희생자가 되어야 하다니. 인구 60만의 변방 소도시이지만 차는 막힌다. 

 

러시아와 중국 심지어 일본까지 뺏고 뺏기던 땅따먹기의 요충지,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이 만나는 시베리아의 양수리. 한때는 퉁구스를 비롯한 동아시아족들의 본거지. 마지막 황제 푸이가 태평양전쟁 종전 직후 일본으로 망명하려다가 소련 공수부대에 잡혀서 5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곳(1950년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된다). 김정일의 실제 출생지(백두산이라고 선전하지만) 블라디보스톡보다 더 유럽 분위기가 나는 이 아름다운 도시는 올해 12월 31일까지만 극동연방관구의 수도이다. 내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이 수도의 지위를 승계한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나의 능력이 놀라왔다

 

▲ 러시아 도시 어딜 가나 반드시 있는 레닌광장의 레닌


예약해 둔 호스텔이 기차역 앞이라 교통체증이 더 심했다. 허름한 건물의 뒤로 돌아가니 꽤 넓은 공터를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다. 호스텔의 CCTV 턱밑에 차를 세웠다. 자동차 여행자들에게 자동차 사고 이상으로 민감한 문제는 동네 불량배나 절도범들의 차량 파손이다. 동전 몇 개 꺼내느라 유리창을 깨버리면 일이 복잡해진다. 같은 모델의 차량 유리창이 없으면 한국에다 주문하고 마냥 기다려야 한다. 시간과 돈이 하염없이 사라져 버린다. 숙소를 예약할 때 최우선 옵션으로 주차장을 체크하는 이유이다. 

 

프런트 직원 까챠의 영어가 나쁘지 않았다. 방을 배정받아 짐을 내려놓고 침대 시트를 씌우면서(저렴한 호스텔은 고객의 노동력으로 인건비를 상쇄한다) 오로지 배고픔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종일 컵라면 하나만 먹어야 했던 시베리아 쏘렌토 수용소 생활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멋진 식사를 꿈꾸었다. 샤슬릭과 보르시는 기본이고 뭔가 더 감동적인 것이 있을 거다. 바이칼에서 잡아 올린 생선, 오물을 빠트릴 순 없지. 아니야,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채(Hors d'oeuvre·前菜) 가 나오기 전에 메뉴판을 뜯어 먹거나 혈당저하로 쇼크사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패스트푸드란 말인데 여기에서까지 맥도날드를? 등등. 

 

정말 그렇게 순수하게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 놀라웠다. 어딜 가서 뭘 먹을지는 쉽게 정하지 못했고 스마트폰의 앱으로 검색하는 일조차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무작정 나가자 생각했다. 역 앞이니 식당이 좀 많겠는가.

방문을 닫고 로비로 나가는데 약간의 잡음이 들렸다. 젊은 여자 손님이 프런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뭔가 잘 해결이 안 되는 분위기였다. 까챠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손님은 얇은 카디건과 숄을 걸친 채 거대한 트렁크를 끌고 왔는데 진눈깨비를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젖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한국분이세요?”


한국인 또는 한국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칭을 동원해서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려고 연구하는 것 같다. 사람을 높여서 이르는 말 ‘분’은 어색하게 들린다. 그냥 “한국사람이세요?”면 충분할 텐데. “예, 반가와요”라고 대답하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산에서 온 S양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오산에서 온 초록색 머리의 S양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약간 소리도 내었다. ‘엉엉’은 아니고 ‘흑, 허윽’ 정도의 강한 이펙트음을 터뜨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도 좀 당황했지만 까챠가 크게 놀랐다. 까챠는 S양을 구타하거나 인종차별을 한 일은 결코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한참을 울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추석 연휴를 맞아 근사한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 S양은 61년생 아버지와 엄마, 연년생 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러시아 여행을 가겠다고 집을 나섰다. 61년생 아버지의 소박한 꿈이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이었는데 딸만 둘이라 목욕탕을 같이 가는 일은 곤란하게 되었다. 

 

모범생 언니는 공부를 잘해 대학생이 되었지만 초록 머리 동생은 공부에 흥미가 없어 고교졸업 후 직장에 취직해서 돈 벌러 다닌다. 그녀는 비록 아버지와 목욕탕을 같이 가지는 못하지만, 여느 아들 못지않게 씩씩하고 튼튼하게 잘 성장했다. 이번에 단독여행을 감행하는 것도 아들보다 씩씩한 둘째 딸의 용맹을 보여주는 목적도 없지 않다고 진술했다(?). 해외여행은 가족과 함께 일본을 간 게 전부이고 이번이 두 번째 여행인데 원래 좀 대담하고 모험을 좋아하기 때문에 혼자 여행하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 하바롭스크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오늘 아침 예약해 둔 저가 항공을 타고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는데 저가 항공인 만큼 원래 예정보다 네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고 그의 트렁크가 유난히 늦게 나오면서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까지 9.1km 22분 거리를 오는 동안 운전 기사에게 숙소 이름을 알려주고 택시요금을 물어보는 과정을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서 시도했다. 그 택시가 하바롭스크 정부에서 인가한 택시인지 지역 마피아가 운영하는 불법 자가용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공항에서 산 유심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구글 번역기와 네이버 파파고가 이 가련한 솔로 여행 소녀를 완벽히 도와주지 못해 혼란이 생겼다. 택시는 기차역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엉뚱한 건물에 S를 내려 주었고 또다시 번역기를 돌려 가며 불친절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러시아 행인들에게 숙소를 물어물어 찾아야 했다.


“추위에 떨었더니 라면이 너무 땡겨요”


▲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나오면 만나게 되는 이 동상은 17세기 이곳을 건설한 카자크 탐험가 대장 예로페이 하바로프. 그로부터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다.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는 바람에 흠뻑 젖은 채 떨면서 낯설고 어두운 밤거리를 헤맸다. 예쁜 셀카를 위해 다양한 의상을 집어넣은 거대한 트렁크를 끌고 다니며 그녀는 러시아를 원망하며 단독여행을 후회했고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무리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들 하바롭스크의 밤거리에서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녀는 번역기와 통역기를 혼동하고 있었다. 한국어는 대부분의 외국어와 문장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러시아 같은 비영어권 국가에서 번역기를 이용해 의사소통하려면 영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앱을 만든 나라가 영어권이다. 영어로 문장을 만드는 일이 여의치 않다면 간단한 단어 몇 개를 번역해 소통하는 게 안전하다. 그리고 스마트폰 앱의 번역은 문장, 즉 글을 다른 글로 번역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말과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그 내용을 이해해서 즉각 전해 주는 동시통역사가 아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숙소에 도착한 S양은 주거증명을 위한 까챠의 간단한 질문과 여권을 달라는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어를 듣게 된 것이다.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지만 무인도에 실종되어 한 달만에 처음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으니 울음부터 터뜨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뜨거운 동포애를 느끼며 그녀를 진정시키다가 나처럼 그녀도 종일 굶었다는 얘기를 듣고 반가왔다.


“잘됐네요. 우리 같이 뭐 좀 먹어요. 뭐 먹고 싶어요?”
“라면이요.”
“…”
“추위에 떨었더니 라면이 너무 땡겨요.”

우리는 먹어야 산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그렇다고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수렵의 시대가 끝나고 농경을 통해 잉여가 생기면서부터 우리들은 먹는 행위를 통해 생존 이상의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는데 성공적이었다. 축제와 향연은 산해진미를 쌓아두고 그 성취를 위해 헌신한 집단의 유대를 강화했고 제사상에 오르는 귀한 음식들은 종족의 번영과 안전을 심리적으로 담보해 주는 역할도 했다. 기아에서 풍요, 풍요에서 과잉에 이르는 수만 년동안 음식은 지역과 인종에 따라 전통과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농경기술의 향상, 종자개량, 유전자 조작 등 무엇이 원인이던지 간에 우리는 음식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풍요로움이 지구상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하라 이남은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UN에 따르면 날마다 2만5000명, 한 해 평균 910만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와 일부 아시아 어린이의 기아는 심각하다. 5초마다 어린이 한 명씩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장거리 운전의 경우 과식은 당연히 금물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한편에서는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많이 먹어서 문제다. WHO는 몇몇 가난한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에서 과체중과 비만으로 인한 사망률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2016년 기준으로 18세 이상 성인 중 19억명이 과체중이고 심각한 비만인구는 6억5000만명을 돌파했다. 비만으로 인한 심혈관질환, 당뇨, 암 등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2015년의 경우 400만명에 달한다. 이는 교통사고와 알츠하이머, 테러에 의한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이다. 일반적인 문명국가에선 못 먹어서 죽는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 너무 많이 먹어서 죽어간다. 

 

1년간의 여행을 위해서 라면 다섯 박스를 실었다. 30X5=150개의 라면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는데 하루 한 끼를 라면으로 해결한다 치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먹어야 모두 소모한다는 얘기다. 꽤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는 한국 라면을 선물했고 수시로 먹었지만 귀가할 때 다섯 봉지가 남아 있었다. 자동차에 싣고 온 비상식량, 용품, 준비물들은 넘치고 넘쳐서 찾는 일이 수고가 되었다. 자동차여행에선, 특히 장거리 운전의 경우 과식은 당연히 금물이다. 배 속에 가득 찬 가스때문에 고통을 겪거나 무시무시한 졸음운전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너무 많아서 좋은 게 뭐가 있겠는가.

늦은 밤, 비도 눈도 그친 하바롭스크의 호스텔에서 S양과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라면을 함께 먹었다. 샤슬릭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UPI뉴스 / 글·사진 장용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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