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DJ 평생 동지이자 여성운동가 효시

김당 기자 / 기사승인 : 2019-06-11 04: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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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여성운동가∙김대중 인생 동반자 97세로 '동행'
DJ와 결혼후 격변의 현대사 시련 온몸으로 겪어
여성운동가로서 독자적 업적…여성 정치 확대 기여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 평생의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밤 11시37분께 별세했다. 향년 97세. 이 여사는 노환으로 지난 3월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1922년생인 이 여사는 이화고녀(이화여고)와 이화여전,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영문과로 입학해 전과)를 졸업했다. 이후 YWCA 총본부 외교국장으로 사회활동을 하다가 미국 유학을 가 램버스대(사회학과)를 거쳐 스카릿대 대학원(사회학과)을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대한YWCA 총무·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노처녀 여성운동가 이희호, 홀아비 정치인 김대중의 결혼과 동교동 부부 문패


▲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결혼식 장면. 결혼식은 1962년 5월 10일 서울 체부동에 있던 이 여사의 외삼촌 이원순(전국경제인연합 창립 멤버)옹의 한옥집 앞뜰에서 이뤄졌다.


DJ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노처녀 여성운동가 이희호는 1962년 40세 때 두 아이가 딸린 홀아비 정치인 김대중과 혼인했다. 신접 살림은 동교동 178-1 번지에 전세로 들었는데, 1년 뒤에 그가 은행융자를 보태 장만한 동교동 집은 일산과 청와대 시절을 제외하면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동교동 집은 한때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받는 대표적 재야인사의 익명성과 그의 가신 정치를 상징했다. 하지만 동교동 집은 페미니스트 김대중의 여성에 대한 존중과 여성운동가인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을 담은 상징으로도 유명하다.

동교동 집을 장만하고 얼마 뒤에 김대중은 '金大中'과 '李姬鎬'라고 적힌 2개의 문패를 내놓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부는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그때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나중에 김대중이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의 서두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라는 표현과 함께 이 문패는 김대중-이희호 부부의 동반자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타고난 페미니스트인 김대중은 어머니와 두 아내를 평생 동안 아끼고 사랑했다. 특히 세 며느리와 세 손녀를 아들보다 사랑했다. 47년 동안 김대중과 함께 한 그가 한 얘기다. 이 여사는 평소에 세 딸을 둔 큰며느리를 '황금메달'감이라며 자랑했다. 이에 비해 세 아들을 둔 시어머니인 자신은 '목메달'감이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이 여사의 이런 생각은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최초로 여성부를 설치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그는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 여성의 공직 진출 확대를 비롯해 여성계 인사들의 정계 진출의 문호를 넓히는 데도 일조했다. 


한명숙 전 총리를 비롯해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박영숙 전 평민당 부총재, 이미경 한국국제협력재단 이사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등이 김대중의 발탁으로 정계에 진출한 대표적 여성 정치인들이다.

역대 최고령·최고학력의 퍼스트 레이디

이 여사는 1997년 마침내 역대 대통령 부인 중에서 최고령(75)에 최고 학력의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납치, 구금, 망명, 연금으로 점철된 김대중의 정치적 동지로서 그와 함께 파란만장한 시련의 삶을 살았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 재직 시절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까지 잇달아 구속되는 개인적 아픔도 겪어야 했다. 말년에는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장남 홍일씨의 사망 소식도 알지 못했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박빙(95만표)의 차이로 패배한 뒤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고관절 손상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다. 중앙정보부는 1971년 11월 조영래·장기표·이신범·심재권 4인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하면서 이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경희대 4학년생인 장남 김홍일을 남산 지하실로 연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어 보냈다. 


남편에 이어 자식들까지 무사하지 못하다는 싸인을 보낸 것이다.


▲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희호 여사가 장남 김홍일, 김상현, 권노갑씨 등과 함께 농성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특히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는 남편과 함께 남산 정보부로 연행되어 철야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골이 나서인지 아니면 신앙의 힘 덕분인지 유신 초기에 공포에 떨던 그가 아니었다. 이 여사는 수사관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연하고 결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민주 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희호 자서전 <동행>, 156쪽)

이 여사는 사흘만에 풀려나자 마자 장남 김홍일과 함께 열성적으로 남편을 포함한 구속자 석방투쟁과 정치활동을 했다. 당시 서소문 법원 앞에서 이 여사가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 문동환 목사의 부인 페이 문, 안병무 교수 부인 박영숙 등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검정 테이프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입에 붙이고, 보라색 한복을 입고 시위를 벌인 사진은 오랫동안 박정희 정권의 폭압을 드러낸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구속자가족협의회는 양심수가족협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확대 발전했다.

DJ와 불화 원인은 '온도 차이'


▲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찍은, 미국 잡지 <피플>에 실린 사진을 좋아해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 <동행>의 표지에도 이 사진을 썼다.


옥바라지와 정치활동을 위해 진주와 서울에서 일주일씩 지내던 1977년 12월 어느 날 밤 그는 냉방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다가 쓰러져 혼절했다. 냉방에서 과로와 영양 부족으로 인한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가 가장으로서의 책무까지 짊어진 3중고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진주교도소에 수감중인 남편이 19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껌종이 같은 포장지에 꾹꾹 눌러쓴 '하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80년 5월 이른바 '광주사태'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는 남편이 수감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와 청주교도소, 아들 김홍일과 시동생 등 동교동 식구 9명이 수감된 대전교도소를 오가며 면회를 해야 했다.

그는 김대중과 평생 동지적 삶을 살아왔지만 불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격 차이'가 아니라 '온도 차이'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체질상 유난히 추위를 못 견뎌 하는 반면에 그는 유난히 더위를 못견뎌 했다. 김대중은 여름에도 냉방을 하면 내복을 입는 반면에 그는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았다. 그래서 간혹 "제발 덥다는 소리 좀 그만해요"라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이처럼 추위를 못견디는 남편을 생각해서 그는 한겨울에도 냉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

"남편이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는 겨울이라도 안방에 불을 넣지 말도록 일러두었다. 그는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다. 그런 '애들 아버지'가 영하로 내려가는 감방에서 떨고 있을 생각을 하면 집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동행, 173쪽)

이 여사는 1980년대 미국 망명 시절을 두 사람만의 가장 행복했던 때로 꼽곤 했다. 이때 같은 망명객이었던 필리핀 아키노 상원의원 부부와 만나 식사를 하곤 했다. 이 여사는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찍은, 미국 잡지 〈피플〉에 실린 사진을 좋아해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 〈동행〉의 표지에도 이 사진을 썼다.

일요일이면 DJ는 두 아들과 서교성당, 이씨는 혼자 창천교회로


▲ 도쿄 납치 생환미사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천주교 신자인 DJ와 개신교 신자인 이씨는 평생 각자의 신앙생활을 해왔다.[김당]


이 여사는 외환위기 직후 사회봉사 단체 '사랑의 친구들'과 '여성재단'을 직접 설립해 마지막까지 고문직을 맡는 등 아동과 여성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또한 김 전 대통령 별세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자리를 지키며 두 차례 방북하는 등 의욕적으로 대북 사업을 뒷받침해 왔다.

고인은 미국 교회여성연합회 '용감한 여성상'(1983년), 미국 남가주대학교 '국제사회복지상'(2000년), 펄벅 인터내셔널 '2000 올해의 여성상'(2001년), 미국 스카릿배넷센터 '평화와 정의를 위한 탁월한 지도자상'·'밴더빌트대학교 '도적적 인권 지도자상'(2002년) 등 인권과 여성문제에 기여한 공로로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대중은 천주교 신자(세례명 토머스)이지만 고인은 독실한 개신교(감리교회) 신자다. 두 사람은 평생 각자의 신앙생활을 했다. 김대중 생전에도 평소 일요일이면 남편은 두 아들과 함께 서교성당으로 가고, 그는 혼자서 신촌 창천교회를 찾았다.

기독교의 각 교파가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모범적인 가정이지만 남 보기에는 어색한 풍경일 수 있었다. 특히 정치인의 아내로 대선을 네 번이나 치르는 동안 선거캠프에서는 전국의 절과 교회, 그리고 성당을 두루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하는 상대 후보 부인의 활동을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김대중은 한 표가 아쉬운 선거에서도 그의 신앙심을 지켜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 원칙을 존중해준 유일한 사람인 김대중을 늘 고맙게 생각했다.

남편이 작고하기 1년 전인 2008년에 그가 쓴 자서전 <동행>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 별세 이후에도 두 차례 방북하는 등 의욕적으로 대북사업을 뒷받침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굳건히 잘 걸어온 날들이었다. 남편의 평생 소원인 한민족의 평화가 빨리 정착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동행>, 391쪽)

북유럽 3국을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이희호 여사 서거 직후 핀란드 헬싱키에서 애도사를 내고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께서 늘 응원해주시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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